장경선 벨라뎃다(평화사도 1기 & 동화작가, 평화운동가) 이웃에 살았던 아이가 쓴 동시를 읽고 한참을 웃었다. 제목이 ‘내 손아, 고생이 많다.’였던 것 같다. 손아내 손아고생이 많다.학교 숙제 하느라학원 공부 하느라영어 단어 외우느라지금은 일기 쓰느라손아내 손아진짜로 고생이 많다. 대충 이런 시였다. 학교에서도 힘들고 학원에서도 힘든 손이 일기를 쓰느라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고 보니 손으로 글을 써야 하는 주인을 만난 내 손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마사지를 해 주거나, 네일아트로 치장을 해 주거나, 이쁜 반지 하나 끼워주지 않는 무정한 주인이다. 내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은 특히 못생겼다. 어렸을 때 가운뎃손가락이 팅팅 붓고 곪아 몹시 아팠다. 지금이야 병원으로 달려갔을 테지만 그때는 읍내 있는 병원 가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대추나무 가시로 고름을 짜낸 후, 집 간장을 넣어 반죽한 밀가루를 가운뎃손가락에 붙여주었다. 시나브로 간장 내 폴폴 나는 밀가루 반죽은 말라 뻣뻣하게 굳어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반죽을 떼어내는데 누런 고름이 따라 나왔다. 그렇게 몇 번 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손가락이 말짱해졌다. 그렇지만 가운뎃손가락은 살짝 비틀어져 볼품없게 되었다. 그런 손가락이 부끄러워 자꾸 감추게 되었고, 급기야 가운뎃손가락을 받히지 않고 엄지와 검지만으로 연필을 잡고 글씨를 썼더니 글씨도 엉망이고 힘도 들었다. 못생겼지만 없어서는 안 될 참 고마운 손가락이다. 고맙다 내 가운뎃손가락아. 어찌 손이 하는 일이 글씨 쓰는 일만 있을까. 밥 먹는 일부터, 옷 입기, 인사하기, 책 읽기….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별히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나를 손이 먹여 살리니 기특하고 고맙기가 그지없다. 또 고맙다 손아. 내 몸을 찬찬히 살펴보면 손만 고마운 게 아니다. 눈, 코, 입, 발…. 심지어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내 곁에 있어 고맙다.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나이가 들면서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엿보게 되기 때문이다. 얼굴 못지않게 손도 그런 것 같다. 평생을 농부로 살아온 외할머니 손은 몹시 거칠거칠했다. 손톱이 자랄 틈이 없었던 할머니의 손은 겨울이면 쩍쩍 갈라졌다. 그 손으로 내 등을 쓱쓱 쓸어내리면 어찌나 시원한지 잠이 소르륵 쏟아졌다. 옛날 분 치고는 키가 컸던 외할머니는 연세가 들수록 등이 점점 굽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그런데도 논으로 밭으로 쉬지 않고 일을 다녔다. 이른 아침과 저녁이 아닌데도 할머니가 방에 앉아 구부정한 등을 보일 때는 기도할 때였다. 일하지 않을 때는 항상 묵주 알을 돌리셨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박해받던 시대부터 천주교 신자 집안이다. 그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저녁밥을 먹고 설거지가 끝나면 십자가 앞에 주욱 둘러앉아야 했다. 저녁 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치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맨 앞에 앉아 선창을 하고, 그 뒤에 올망졸망 모여 앉은 우리들은 후창을 했다. 저녁 기도까지만 해도 낭랑했던 우리들 목소리는 묵주기도가 시작되면 힘이 빠졌고 한 명 두 명 코방아를 찧었다. 기도 소리는 ‘자장 자장 잘도 잔다….’ 자장가가 되었다. 졸며 웅얼거리며 묵주기도 5단을 끝내면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묵주기도가 끝나면 쏟아지던 잠이 거짓말처럼 도망쳐 버렸다. 엄마 집에 가면 무의식적으로 새벽에 눈이 떠진다. 이제는 외할머니 대신 엄마가 구부정한 등을 한 채 묵주 알을 돌린다. 어느 날 보니 묵주 알을 돌리는 엄마 손에 18K 반지가 끼여져 있었다. “웬 반지예요?” “묵주반지가 다 닳았다.”묵주반지가 닳아 둥근 반지가 되도록 엄마 손도 닳았다. 닳고 닳은 그 손이 나와 우리 형제를 먹여 살렸다. 당신의 두 손으로 일궈낸 노동으로 우리 형제를 살찌웠다. 닳고 닳은 엄마 손톱 밑에는 까만 흙이 끼여 있다. 그 흙속에 꽃나무가 자라 각양각색의 꽃을 피우는 상상을 하면 참 즐겁다. 철마다 피고 지는 꽃들이 다투어 향기를 내뿜는다. 싱그러운 흙내음이다. 엄마 손톱 밑에서 피어난 꽃향기는 날아드는 벌과 나비의 일용할 양식이 된다. 사람들은 제각각 향기를 내뿜는다. 꽃들이 내뿜는 향기는 코로 맡지만, 사람이 내뿜는 향기는 마음으로 맡아야 한다. 평생을 흙을 벗 삼아 산 엄마에게는 흙냄새가 나는데, 컴퓨터 자판기만 두드리고 사는 나는 무슨 향기를 뿜고 있는지 몹시 걱정된다. 그저, 나의 향기가 너의 아픔이 아니길 기도한다. 나는 얼마나 무시당하며 사는 것을 허락하는가?나는 어느 정도까지 손해 보며 살 수 있는가?나는 내 생명의 어느 부분까지 조건 없이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며 살 수 있을까?나는 얼마만큼 다른 사람의 미운 짓을 받아들이며 살 수 있는가? 오늘 아침 주임 신부님 강론 말씀이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