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미 헬레나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대표, 팍스크리스티코리아 공동대표) <평화를 배우다> 이번 호에서는 『피스빌딩 - 가톨릭 신학, 윤리, 그리고 실천』의 4장, 노틀담대학 정치학, 평화학 교수 다니엘 필포트(Daniel Philpott)의 글을 소개합니다. 카슈미르와 브룬디에서 신앙에 기반을 둔 화해 활동을 펼친 활동가이기도 한 필포트 교수는 정치 현실에서 화해의 역할에 대해 성찰합니다.긴 글 가운데, 처벌도 회복적 정의의 한 조치가 될 수 있다는 내용만 간추려 싣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과거의 불의를 다루는 나라들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을 들어보면, 처벌은 화해의 윤리와 잘 맞지 않는다.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화해, 자비,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그리고 용서는 처벌, 보복, 투옥, 그리고 해명, 책임과는 대립되는 개념이다. 종종 처벌의 편을 들고 처벌을 부인하려는 화해의 요구에 대해 경고하는 쪽은 자유주의 패러다임 지지자들, 특히 인권 옹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그들의 주장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서구를 지배해 온 처벌에 대한 두 개의 합리화 이론인 응보주의(retributivism - 법을 어기면 그 대가로 고통을 받아야 하고 범죄에 대한 대응은 가해 행위에 비례해야 한다는 처벌 이론)와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 행동의 결과가 그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궁극적인 기초라고 주장하는 규범적 윤리 이론) 사이를 오락가락해 왔다. 응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자들은 인권을 침해한 사람들이 단지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한다. 처벌은 범죄에 비례해야 하며, 대개는 투옥의 형태를 취하고, 항상 공정한 재판을 따라야 한다. 응보주의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하지만, 아주 순수한 차원에서 응보주의는 범법자들이나 관계의 회복과는 별개로 처벌을 요구한다. 그저 처벌이 균형, 즉 한 사회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적절한 비율, 형이상학적 균형, 또는 하느님의 마음속에 있는 옳고 그름 사이의 총합을 회복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과주의자들처럼, 인권 옹호자들 역시 처벌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들, 즉 가해자들이 다시 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전쟁 범죄자들을 저지하고, 가장 일반적으로는 새로운 입헌 자유 민주주의가 정당성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해명 책임을 제공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처벌이 정의의 개념으로서의 화해와 충돌할 필요는 없다. 사실 ‘회복적’ 논리로 정당화되면, 처벌은 정치적 화해의 윤리를 구성하는 실천행위가 될 수 있다. 응보적 정의와 마찬가지로, 회복적 처벌은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은 행위에 비례하는 처벌을 받아야 하며, 처벌은 박탈과 고통을 포함하며, 정당한 법 절차는 처벌 결정에 필수적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처벌의 핵심 근거는 사회적 또는 우주적인 균형이 아니라 사람 개인의, 관계의, 그리고 정치 질서의 회복이다. 처벌이 다루는 상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 자신의 영혼 속에 담긴 불의와 무질서의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승리한다는 부분이다. 처벌은 공동체의 정의로운 가치를 침해한 행위에 대해 가해자를 비난하고 가해자에게 자신의 불의를 깨닫게 하고, 양심의 가책을 드러내 보이고, 사죄하고, 결국 공동체에 다시 합류하도록 초대한다. 회복적 처벌은 범죄학자들이 ‘엄한 처우’라 부르는 투옥이나 다른 형태의 고난 같은 것을 포기하지 않는데, 그것은 범죄의 심각성을 전달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것은 처벌을 받는 범죄자에게 뉘우침의 물리적인 표현, 즉 속죄로 작용할 수 있다. 처벌은 또 범죄자들을 억제하고, 앞으로 범죄자가 나오지 않도록 저지하며, 새로운 정치 질서를 위한 정당성을 만들어냄으로써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결과주의와는 달리, 처벌의 유효성은 이런 이점에 좌우되지 않는다. 심지어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뉘우칠지 뉘우치지 않을지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뉘우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처벌은 여전히 공동체의 속죄적 소통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가톨릭교회 교리서』도 비슷하게 회복적 차원에서의 처벌을 표현한다. 처벌의 ‘주요 목적’은 범죄 행위, 즉 올바르게 정돈된 관계를 찢어놓음으로써 초래된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인용하여, 처벌의 목적은 의학적 치유와 회복이라고 말한다. 『간추린 사회교리』는 처벌에 대해 이렇게 논평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한편에서는 범죄자의 사회 복귀를 독려하는 것 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화해의 정의를 기르는 것, 즉 범죄행위로 인해 파괴된 사회적 관계에 조화를 회복할 수 있는 정의를 배양하는 일이다.” 과거의 불의를 다루려는 정치 질서 입장에서 볼 때, 회복적 처벌은 일련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해자를 지역사회에 재통합하며, 피해자와 공동체 구성원을 참여시키고, 다른 실천행위들과 통합된 책임 해명의 형태를 함축한다. 주요 전쟁 범죄와 기타 대규모 인권 침해 행위를 기획하고 감독하는 데 큰 책임이 있었던 사람들의 경우, 장기간의 투옥만이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심각성을 전달하고 미래 정권에서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를 부여할 수 있다. 살인, 강간, 폭행, 고문의 단일한 또는 한 가지 행위를 저지른 범인 역시 수감되어야 한다. 회복적 정의가 투옥에 그 나름대로의 논리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회복적 정의는 공적 기록을 위한 행위의 노출,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 회복, 피해자의 인정, 그리고 적어도 덜 중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공동체로의 재통합을 강조하는 공개 포럼 같은 보완적인 제도들을 옹호하는 일에서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회복적 처벌의 윤리는 완결되어야 할 수많은 다양한 질문과 딜레마, 즉 정당한 법 절차, 과실의 결정, 범죄 행위가 저질러진 정권의 적극적인 법률 제도 아래서는 불법이 아니었던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한 기소, 그리고 사법 제도가 파괴된 국가들에서의 처벌의 어려움 등에 직면해야 한다. 과도기 상황에서 가장 흔하고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기억상실의 문제다. 일괄적인 사면은 회복적 처벌의 윤리에서 도덕적 실패인데, 그것이 투옥되어 마땅한 사람의 투옥을 막기 때문이다. 사면이 승인되어야 할 때, 가능하다면, 사면에는 가해자가 공개 포럼에 참가하거나 적어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여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