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빈 멜라니아(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샬롬회 회원) 최근에 제 자신과 지난 삶을 돌아보는 피정에 다녀왔습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를 알고, 여전히 마음 한편을 아프게 했던 시간과 화해하는 며칠이었습니다. 짧은 피정에서 돌아와 원고 마감을 위해 책상 앞에 앉으니 조선학교 그리고 재일조선인과의 만남은 내 삶의 시간 속 어떤 때, 어떤 계기로 시작되고 이어졌는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연재에서 소개한 것처럼 저는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재일조선인 작가, 감독들의 작품을 통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삶에 관해 관심이 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지금 일하는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로 자리를 옮기면서, 조선학교를 방문하고 재일동포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회 한국관구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예수회 일본관구와 협력해 재일동포들과 동반하는 활동을 해오고 있었고, 제가 합류할 때는 그 일환으로 서강대학교 학생들과 조선학교 학생들의 교류를 도모하는 프로젝트가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조선학교 수업 모습 Ⓒ몽당연필 프로젝트에 처음 참여하면서는 실제로 조선학교를 방문하고, 재일조선인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기대와 약간의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20대 내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일조선인의 삶과 조선학교의 생활을 접했기에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있다고 믿었던 탓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착각이자 오만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만나고 사귀게 된 재일동포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만의 고유한 역사와 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주고받는 감정은 비단 민족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이들의 비장함과 이를 지지하는 자의 감동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대와 한계, 미안함과 서운함, 선망과 콤플렉스를 오가며 교차하는 복잡하고 인간적인 교감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관계처럼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작은 일들이 서로에게 상처로 가 닿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조선 사람에 대한 차별과 핍박이 존재하는 일본에서 대를 거듭하며 민족 정체성을 지켜온 재일동포들과, ‘민족’이라는 명명이 오히려 우리를 일정한 틀 안에 가두어버린다고 느끼는 한국의 청년으로서 우리의 만남은 기대보다 다단한 차원에서의 만남이었습니다. 재일조선인 외에도 여러 나라의 동료들과 연대하며 일하는 업무의 특성상 저는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국적과 인종, 민족의 동료들, 친구들과 교류하고 있습니다. 많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한 데 만나게 한 ‘가치’ 덕분에 동료들과의 만남은 대체로 지지와 격려의 시간이며, 이는 일의 피로와 무기력을 극복하는 힘이 되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조선학교와 함께한 프로젝트는 여타 프로젝트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것은 역시 우리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 한 번도 한국에 와보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풍요로운 우리말을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감동입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단어가, 문장 말미의 어감이, 말투의 억양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이 감동은 배가됩니다. 조선학교 수업 모습 Ⓒ몽당연필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같은 언어의 조금 다른 용례는 오해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서툰 영어로 나누는 지지와 연대의 만남은 그 설익음으로 말미암아 그저 따뜻한 시간과 공간의 자장 안에 머물 수 있었지만, 서로가 우리말이라고 생각하며 지키고 사용해 온 유창한 말들로 이어지는 대화는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는 미묘한 감정들을 툭 하고 건드리곤 합니다. 한 번은 서울에서 온 우리를 환대하기 위해 찾아온 재일조선인 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조선학교와 지역 재일조선인 사회를 위해 큰 노력을 해온 존경받는 분이고, 청년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주신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며 지역 ‘여맹(여성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청년들 가운데는 저도 모르게 “풋”하고 웃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여맹’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는 좀처럼 들어보기 어려운 말이었고, 이 말이 풍기는 강경하고 비장한 어투가 한국 청년들에게는 어딘가 어색하게 들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날 나눔 가운데 ‘여맹’이라는 말에도 웃어 버리는 청년들을 걱정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금만 다른 표현이 나와도 낯섦을 먼저 표현하는데 교류가 잘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말이 우리말은 아니잖아요?” 확실히 재일조선인의 우리말은 서울에서 온 우리가 듣기에는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억양은 일본어 영향이 느껴지고, 표현은 우리 기준에서는 너무 북한식 같습니다. 그러나 “서울말이 우리말은 아니”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요? 조선학교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깊어진 재일조선인들과의 교류는 여러 면에서 축복이었지만,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는 한국, 특히 서울 중심의 생각하기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조선학교 학생들 모습 ⒸKBS ‘남북의 창’ 갈무리 우리는 손쉽게 우리말, 우리 민족, 우리 문화를 말할 때 우리가 속해있는 맥락에서만 ‘우리’를 느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다 건너 또 철책 너머에도 우리말, 우리 문화를 이어가는 우리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조선학교 프로젝트는 항상 조선학교 아이들의 학예회를 서강대학교 학생들이 관람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조선학교 문예 발표회는 아이들의 가족뿐만 아니라 지역 동포 사회가 모두 참석하는 마을 잔치입니다. 서울에서 건너간 학생들은 이날 처음 조선학교 아이들과 재일조선인 동포들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제게는 어렵게 이어간 우리 프로젝트를 생각할 때면 항상 가장 먼저 떠올라 마음을 찡하게 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서울에서 온 청년들이 문예 발표회를 관람하기 위해 어색하게 학교 강당에 들어서 자리를 찾아 앉은 순간, 어느 동포 어르신이 “어디에서 왔어요?”라고 물어오셨습니다. “서울에서 왔어요”라는 청년의 대답에 어르신은 “말이 통합니까?”라고 물었고, 청년은 “네 잘 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르신은 이렇게 이르셨습니다.“말이 통하면 통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