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가능합니다!제6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바오로 6세 교황 (1972. 12. 8. 발표)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듭 평화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제도들 안에서 평화는 다시 그 고유의 근본 특성을, 평화에 관한 잘못된 관념 때문에 사람이 쉽게 잊는 평화 고유의 근본 특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격정이 아니라 반드시 이성 위에 기초해야 합니다. 평화는 이기적이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관대해야 합니다. 그런 요구에 따라 평화는 활력이 없고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역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진보적이어야 합니다. 평화는 나약하고 비효율적이고 비굴하지 않아야 하지만, 평화를 정당화하는 도덕적 근거들에 있어 그리고 평화를 떠받쳐야 할 민족의 견고한 지지에 있어 반드시 강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섬세한 요점이 나타납니다. 만일 평화를 촉진하고 보호해야 할 근대의 이 기구들이 그들이 수행할 특별한 기능에 적합하지 않았다면 세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그 기구들의 무능이 사람들 마음에 피할 수 없는 각성을 불러일으키게 되어있다면, 평화는 이 기구들 때문에 패배했을 것이고 그와 함께 문명의 진보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화는 가능하다는 우리의 희망과 신념은 먼저 의심으로, 그런 다음 냉소와 회의주의로, 그리고 마침내 부정으로 질식하였을 것입니다. 아, 그랬다면 그 끝은 무엇이 되었을까요! 누군가는 그 같은 파국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회피합니다. 평화는 가능하다는 기본 진술은 다음의 두 가지 보완하는 확언들로 한 번 더 반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평화가 참으로 뜻하는 바라면 말입니다. 평화는 가능합니다. 그리고 만일 평화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의무입니다. 이는 평화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도덕적 힘들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제가 다른 자리에서 말한 것처럼, 평화의 용기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평화의 용기는 가장 높은 품위의 용기, 곧 잔혹한 폭력을 사용하는 용기가 아닌 사랑의 용기입니다. 반복해 말씀드립니다. 누구나 다 우리의 형제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정의가 없으면 그곳에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나 다 그것이 경제적이건 정치적이건 그 어떤 지배하려는 의도나 계산된 지배의 목표로부터 자유로운 협력의 틀 안에서, 고유하게 발전하는 것을 촉진할 수 있게 할 의무를 갖는데 이 의무도 정의의 핵심 요소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저는 가톨릭교회와 친교를 이루는 형제들, 아들과 딸들인 여러분을,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저와 결합한 모든 이를 초대합니다. 다시 한번 평화의 가능성에 관해 성찰합시다. 저는 그런 성찰이 대단히 깊어질 수 있는 길을 가리킴으로써, 곧 인간학의 실재론적 지식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평화의 가능성을 성찰합니다. 이 지식은 역사 안에 있는, 그리고 사람 마음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악과 선의 신비로운 원인을 규명합니다. 이렇게 밝힌 원인은 우리에게 왜 평화는 언제나 과제로 남아 있는지, 왜 평화는 언제나 비관적 해결책들 탓에 위협받는지, 동시에 왜 평화는 언제나 행복한 해결책의 책무뿐 아니라 그 희망으로 장려되는지 그 이유를 우리에게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의 무한히 선하심이 인류의 운명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이 선하심을 섭리라 부릅니다. 우리는 이 섭리가 종종 감춰져 있기는 하나 실제로 지배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구원사에서 모든 인간 상황이 낯설지만 비범한 불가역성을 지니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8 참조) 우리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는 산상 설교의 일곱 번째 참 행복을 우리의 뇌리에 새겨 놓았습니다. 우리를 속이지 않는 그 희망(로마 5,5 참조)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향한 성탄 밤의 평화 선포(루카 2,14 참조)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성령께서 주신 선물과 인사와 성경의 바람인 평화를 우리 입술 위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밀하지만 틀림없는 평화의 샘,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에페 2,14)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평화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한다면 사람들 가운데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평화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평화라는 관념도, 평화의 희망도, 평화를 향한 열망도, 평화의 경험도 사라지게 놔두지 맙시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안에, 모든 수준에서 평화를 향한 염원을 새롭게 합시다. 가장 내밀한 양심의 지성소 안에서, 가정생활 안에서, 사회적 갈등의 변증법 안에서, 계급 사이와 민족 사이의 관계 안에서, 평화를 그들의 깃발로 내건 발의들과 국제 제도들의 지지 안에서 평화를 향한 염원을 새롭게 합시다. 우애를 가르침으로써 그리고 이웃 사랑과 정의와 그리스도교적 용서를 실천함으로써 평화를 가능한 것으로 만듭시다. 평화가 내팽개쳐진 곳이라면, 진실하고 적극적인 결론을 내올 정직한 협상들을 통해 평화를 향한 문을 열어갑시다. 그 어떤 관대한 인격의 존엄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평화를 더 빠른 것으로, 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더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 희생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맙시다. 우리 시대 역사의 모진 실재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비극적이고 이겨낼 수 없는 그 모순들 앞에서, 침략적인 힘이 과시하는 매력들 앞에서, 무죄한 이들을 공격하는 맹목적 폭력 앞에서, 전쟁이라는 거대 사업을 예상하고 투기를 하려 작업하는 그 숨겨진 속임수 앞에서, 그리고 더 약한 민족을 억압하고 노예로 삼으려 조작하는 그 숨겨진 속임수 앞에서, 마침내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고뇌에 찬 물음, ‘평화는 언제나 사람들 가운데서 가능한가? 참된 평화는?’ 하는 물음 앞에서, 이 물음 앞에서, 믿음으로 충만하고 사랑으로 강한 우리 마음에서 단순하고 의기양양한 응답, ‘예, 가능합니다!’라는 응답이 솟아오릅니다. 이 응답이 우리를 희생으로, 인류를 위한 정직하고 끈기 있는 사랑으로,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이 되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예, 가능합니다!’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응답이 되게 합시다. 1972년 12월 8일, 바티칸에서, 바오로 6세 이 글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에서 2021년 4월 출간된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 실린‘제6차 평화의 날’ 담화의 일부를 발췌한 글입니다. 전문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홈페이지(www.pu2046.kr) 자료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