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미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대표, 팍스크리스티코리아 공동대표) 이번 호에서는 『피스빌딩 - 가톨릭 신학, 윤리, 그리고 실천』의 10장, 보스턴 대학의 사회윤리학 교수 케네스 하임즈(Kenneth R. Heims)의 글을 소개한다. 작은형제회 소속 사제이기도 한 케네스 하임즈는 가톨릭 사회교리와 피스빌딩의 긴밀한 관계를 검토하고, 나아가 가톨릭 사회교리가 ‘더 발전해 나가야 할 점’까지 비판적으로 논의한다. 여기서는 가톨릭의 가르침 안에서 논의되는 평화의 3가지 영역에 대해 소개하고, 특히 정치 영역에서 추구하는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가톨릭의 가르침 안에서 평화라는 이상이 중심이 된 영역은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평화, 히브리어로는 샬롬(shalom), 그리스어로는 에이레네(eirené)에 대해 말할 때, 성경 저자들은 정치 영역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아우르는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어떤 의미에서 평화는 하느님과의 약속 안에 있다는 것과 관계된다. 즉, 하느님의 자비롭고 충실한 사랑을 알고 그 안에 머물러야 한다. 하느님의 평화 안에 머무르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그리고 모든 신성한 피조물과 함께 조화롭고 정의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이다. 이것은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사는(이사 11, 6) 이사야의 평화로운 공동체이다. 또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이루는 평화로, 요한묵시록에 묘사되어 있듯이, 천상의 예루살렘이 내려올 때 더 이상 눈물도 괴로움도, 고통도 죽음도 없을 것(묵시 21, 4)이라는 의미의 평화다. 평화의 이런 전망은 인간이 삶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 용기를 북돋아주고 편안하게 해준다. 이것은 하느님의 힘이 인간의 악보다 강하며, 언젠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진정으로 통치하시리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인류의 마지막 운명인 종말 신학의 영역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드러나는 평화다. 평화에 대해 말할 때 두 번째로 공통되는 방식은 사도 바오로와 사도 요한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현존 안에 살 때 개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내면의 평화다. 여기서 평화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셨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진정으로 용서하시며, 우리가 마땅한 자격 이상으로 소중히 여겨지고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는 데서 나온다. 내면의 평화는, 예수님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은총을 받았다는 믿음의 선물에서 흘러나온다. 내면의 평화는 은총의 산물이며, 사도 바오로가 선포한 대로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로마 6, 4-11). 요한은 이것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결합(요한 15장)으로 묘사했다. 요컨대, 그리스도와 친교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됨으로써 알게 되는 평화다. 이것은 영성의 영역이며,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을 통해 개인이 얻을 수 있는 내적 경험이다. 가톨릭 전통 전반에는, 내면의 평온인 평화와 역사를 뛰어넘는 창조의 완성으로서의 평화 둘 다와 구별되는, 평화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하나 더 있다. 질서정연한 정치 공동체가 이루는 평화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평온의 질서(tranquillitas ordinis)’라 묘사한 평화와 닮아있다. 평온의 질서는 올바른 구조를 지닌 정치 공동체의 결과물로, 사람들이 공동선을 향한 믿음과 자비, 자유와 정의 안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암브로조 로렌체티(Ambrogio Lorenzetti),<선정이 도시에 끼친 영향>(Effects of Good Government in the city), 1338-1339 평온의 질서라는 표현이 평화는 한 번에 이룰 수 있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조화로운 상태의 달성을 의미한다고 여기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몰역사적인 접근방식을 취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평온의 질서는 오용된다. 올바르게 이해하면, 질서의 평온은 전체와 연결된 각 부분이 적절한 순서를 갖출 때 달성된다. 정치 공동체가 시민의 평화를 달성하면 시민은 서로 올바른 관계 안에 있게 된다. 인간은 변화하고 관계는 발전하므로, 평화 추구는 변화하지 않는 사물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평화 추구는 올바른 관계를 이룬 공동체를 추구하는, 지속적이고, 책임감 있게 대응하며, 혁신적이어야 하는 인간 활동이다. 정치 영역에서의 평화가 진정한 형태의 평화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드러내는 내면의 평화나 종말론적 평화가 의미하는 창조의 완전함을 지니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시되지 않는다. 질서정연한 정치 공동체로서의 평화는 성취해야 할 고귀한 평화이며, 달성하고 수호하기 위해 전념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정치적 평화는 조작되거나 부적절하게 표현되어 왔다. 정치 영역에서 인류에게 ‘일종의 평화’를 뛰어넘어 더 진정한 평화로 나아가기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말론적 ‘견인력’이다. 하느님 나라는 그저 마지막 때에만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못하더라도 역사 안에서 틀림없이 구현되는 것으로서 종말론을 읽는 것이다. 기대되는 또는 예상되는 종말론은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먼 미래에만 국한시키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그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의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현재 상황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진정한 정치적 평화는 피조물의 완전하고 전체적인 전환, 샬롬으로 이끄는 평화다. 종말의 때에 구현될 미래의 평화는 인간이 보다 적절한 정치적 질서를 구축하도록 힘을 불어넣고 요구하며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정치적 평화를 ‘일종의 평화’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또 질서정연한 공동체에 미치지 못하는 그 무엇에도 만족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나 불신 속에서 진정한 정치적 평화를 찾을 수는 없다. 인간의 고결함, 정의, 인권의 기본적인 기준이 확립된 곳에서만 진정한 정치적 평화를 발견할 수 있고, 진정한 정치적 평화가 깃든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