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선 벨라뎃다(평화사도 1기 & 동화작가, 평화운동가) “엄마, 0000에서 두 명이 죽었대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대요.” “학생들이니?”자세한 내막은 딸아이도 몰랐다. 딸아이 얘기를 듣는 순간 왜 나는 A와 B를 생각했을까. 14살 A의 손목에 사선으로 그어진 여러 개의 흉터를 뒤늦게야 보았다. 굵은 가시에 긁힌 자국 같았다. “A야, 왜 이래?”난 이 흉터가 A 스스로 커터 칼로 그은 거라고는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 A는 씩씩하고 밝은 아이였으니까. “그었어요.” “응?” “커터 칼로 그었다고요.”믿기지 않는 대답에 A의 손목을 자세히 보았다. 실핏줄 같은 가느다란 흉터가 손목에서 팔꿈치 근처까지 여러 군데 나 있었다. “왜?” “엄마랑 싸워서 화가 나서요.” “그렇다고 그어?” “엄마한테 긋겠다고 하니까. 엄마가 그으래요. 그래서 그었어요.”남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A의 손목을 쓰다듬는데, 울컥 내 목이 메였다. 나도 죽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너무너무 화가 나서 죽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올랐었다. 당당히 걸어 들어간 내 발등을 수도 없이 찍어 내리고 싶었던 그때. 아프다고 내가 정말 아프다고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마흔 살의 나와의 낯선 대면. 모든 게 괜찮은 줄 알았는데, 내 내면의 상처받은 어른이 지금도 울고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울고 있는 줄도 몰랐던 그날의 그 어른. 나는 A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괜찮아, 다 괜찮아. “A야, 앞으로는 절대 그으면 안 돼.” “정말로 죽는 것 보다, 긋는 게 나아요.”앞에 앉은 A 친구 B가 대답했다. “긋는 순간에는 고통이 사라지니까, 화나고 힘들 땐 그어도 되는 것 같아요.” “아니, 절대 안 돼. 그러다 정말 죽어!”나의 단호함에 아이들이 짐짓 놀랐는지 앞으로는 긋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며칠 후, 중학교 교사인 지인에게 이 얘기를 했다. 지인의 답변에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손목 긋는 게 유행이라니! 죽음이 놀이라니!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스스럼없이 자기 손목을 그어 보인다는 거였다. 이 일이 불과 3-4년 전이었다. 오늘 하늘의 별이 된 생명이 내가 알던 A와 B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이들에게 죽음이란 뭘까? 무엇이 14살밖에 안 된 아이를 죽고 싶게 만들었을까? 아이들은 뜬금없는 행동으로 사랑을, 행복을 갈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가족에게, 동무들에게, 이웃에게…. 상처 입은 깊이만큼, 행복하고 싶은 깊이만큼. 이렇듯 죽음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죽음을 외면하고 무시해버린다. 한번은 도서관에서 ‘안녕, 죽음’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 있었다. 5가족이 20명 남짓 참여했고, 부모들과 5살부터 13살 아이들이 함께했다. 아이들에게 죽음은 무섭고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다. 부모들 역시 죽음은 절대 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죽음과 관련된 그림책을 읽고 ‘죽음’ 하면 떠오르는 낱말을 함께 적었다. 죽음은 어둡고 두렵고 무서운 이미지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각자가 겪은 죽음을 이야기하며 조금씩 죽음과 가까워졌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엄마가 흐느끼자, 당황한 아이는 휴지로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아빠 얘기를 귀 기울여 듣던 아이는 슬그머니 휴지통을 아빠 앞으로 밀었다. 한바탕 눈물과 콧물을 쏟아낸 후, 종이 띠에다 살고 싶은 나이만큼(아이들 대부분은 100살까지 살고 싶어 했음.) 하고 싶은 일을 적었다. 종이 띠는 하고 싶은 일들로 넘쳐났지만, 우리는 종이 띠를 지금 내 나이에서 잘라야 했다. 지금 내가 죽은 것이다. 선뜻 종이 띠를 자르지 못했다. 종이 띠를 자르는 아이도, 그걸 지켜보는 부모도 마음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살아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더 많은 우리 애가 지금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는 거였다. 우리는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며 『내가 함께 있을게』라는 그림책을 읽었다. 얼마 전부터 오리는 느낌이 이상했습니다.“대체 누구야? 왜 내 뒤를 슬그머니 따라다니는 거야?”“와, 드디어 내가 있는 걸 알아차렸구나. 나는 죽음이야.”죽음이 말했습니다.오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요.“그럼 지금 나를 데리러 온 거야?”“그동안 죽 나는 네 곁에 있었어. 만일을 대비해서.”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은 삶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무엇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지를 깊이 성찰케 한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신앙의 순교자들도, 이 땅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스러져간 청춘들 역시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거룩한 죽음이 있어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조금은 나은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거룩한 죽음을 통해 우리는 좀 더 각자의 삶을 진지하게 살게 된다. 알베르토 카뮈의 말처럼 ‘인생에 패배했다는 것, 혹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산다는 게 참으로 값지고 아름답지 않은가.오늘 어린 영혼의 슬픈 소식 때문에 나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죽 내 곁에 머물고 있는 죽음은, 진심으로 내 삶을 응원하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