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석(베드로) 신부 | 민족화해위원장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광주교구의 책임을 맡고 있던 브렌난(Patrick Brennan) 몬시뇰은 쿠삭(Thomas Cusack) 신부, 오브라이언(J. O'Brien) 신부와 함께 목포에서 7월 말경에 체포됐습니다. 당시 광주교구 주교관은 목포에 있었는데, 공산군이 진주하기 전인 7월 16일에 군산에 있던 미 대사관의 영사 맥도넬(Mcdonnell)이 목포의 브렌난 몬시뇰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피난을 떠나라는 미 대사관의 방침을 전하면서, 미군이 대전과 목포 사이의 서쪽 지방을 방어할 의향이 없음을 알렸습니다. 이는 골롬반회의 중심 활동지인 광주, 나주, 목포, 순천 지역이 북한군의 점령지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브렌난 교구장과 목포본당 주임이었던 쿠삭 신부, 보좌였던 오브라이언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왼쪽부터 브렌난 몬시뇰, 쿠삭 신부, 오브라이언 신부 7월 24일 새벽, 목포에 들어온 공산군은 7월 25일에 쿠삭 신부와 오브라이언 신부를 불러내서 목포 시내를 행진시키는가 하면, 7월 30일 주일 미사 때는 신자들의 명단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명단 제출을 거부한 후 신부들은 연행되었고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습니다. 며칠 후에 브렌난 교구장과 두 신부는 광주 교도소로 이송되었다가 이후 다시 대전으로 이송되는데, 9월 24일 대전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중 유난히 본당 신부들의 희생이 컸던 이유는 본당 신부는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본당을 지키고 신자들과 운명을 함께 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미 대사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본당을 지켰던 쿠삭(Tom Cusack) 신부 역시 신자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산군이 쳐들어오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어머니, 만약에 제가 신자들을 버려두고 떠난다면, 앞으로 다시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아들의 편지를 읽은 어머니도 역시 “내가 거기 있었다면, 나도 같은 얘기를 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신자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 아들의 결정에 동의를 나타냈습니다. 이제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는 묵주기도의 성월입니다. 묵주기도 성월은 '개인과 가정의 성화'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류 구원'과 '세계 평화'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는 달입니다. 아직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이 땅에서 십자가 곁의 성모님과 함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