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여러분에게도 달려 있습니다제7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바오로 6세 교황 (1973. 12. 8. 발표) 우리는 있을 수 있는 다음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잠깐이라도 반드시 이러한 중대한 반론(反論)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곧 평화를 나약함(단지 물리적인 나약함만이 아니라 도덕적 나약함까지)과 혼동하는 것, 평화를 참된 권리와 정당한 정의의 포기와 혼동하는 것, 평화를 모험과 희생을 회피하는 일과 혼동하는 것, 평화를 타인의 오만 앞에서 비겁하고 무기력한 굴종과 혼동하고, 그리하여 평화를 노예 상태에 동의하는 것과 혼동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는 오해입니다. 이것은 참 평화가 아닙니다. 억압은 평화가 아닙니다. 비겁함은 평화가 아닙니다. 순전히 외부적 해결, 그리고 공포(恐佈)로 강요한 해결은 평화가 아닙니다. 최근의 유엔 인권 선언 25주년 기념은 저에게 참된 평화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인간 인격의 존엄성 의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 인격의 존엄에서 불가침의 권리들과 그에 상응하는 의무들이 솟아 나옵니다. 평화는 공정한 법과 합법적 권위에 대한 복종을 받아들일 것이고, 그러면서도 결코 공동선과 인간의 도덕적 자유에 대한 고찰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진실입니다. 평화는 심각한 희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평화는 위신을 세우기 위한 갈등, 군비 경쟁, 모욕의 행위 감독, 부채 탕감 과정에서 심각한 희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평화는 용서와 화해의 관대함으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비열하게 인간 존엄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절대로 다른 이들의 정당한 이해관계를 해쳐 가면서 이기적으로 사적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것으로, 절대로 야비한 방식으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의(正義)를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다면, 절대로 평화는 아닐 것입니다. 평화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비천한 이들의 대의를 증진하기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을 절대로 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는 살아남기 위해 삶의 더 높은 가치들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12, 25 참조) 그러나 이런 해명이 평화를 일종의 유토피아로 여겨야 함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평화의 확실성은 ‘존재하는 것’뿐 아니라 ‘되어 가는 것’에도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처럼 평화는 역동적입니다. 평화 영역은 더욱더 그리고 주로 도덕적 책무의 장으로, 곧 의무의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평화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는 정도만이 아닙니다. 평화는 반드시 산출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연속적으로 그리고 진보적으로 실현하는 그런 과정 안에 있고 틀림없이 언제나 이 과정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저는 ‘평화는 그것이 하나의 의무로 고찰될 때만 가능하다.’는 점을 말해야겠습니다. 평화는 대개 완벽하게 검증된 확신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 평화가 이롭다는 것 정도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평화는 최상의 윤리적 목표, 인간의 공존이 본래 명령하는 바들에서 유래하는 ‘아난케(áváνxn)’ 곧 도덕적 필연으로서 반드시 사람들의 양심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중략)제가 감히 저의 형제 여러분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 세계의 운명을 통제하고 있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문화계에 있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사업하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 행동에 평화를 향한 강렬하고 현명한 방향(strong and wise orientation)을 설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욕구에는 평화도 들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평화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그 욕구 실현을 성공할 수 있습니다. 평화 역시 그리고 특별히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신앙과 자비 안에서 저의 형제와 자매들이 된 분들을 위해 분명히 믿을만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을 남겨 드릴 것입니다. 우리한테는 어쩌면 우리만의 본래의 초인적인 협력 가능성을, 평화를 촉진하는 사람들과 협력할 가능성을, 그리고 그들의 노력을 우리의 공동 노력을 유효한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한테는 복음의 참 행복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우리를 모두 다 “하느님의 자녀”라 부르실 수 있게 할 그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마태 5,9 참조)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인민의 양심에 평화를 가르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보다 더 말과 표양으로 평화의 교사들이 되어야 할 책임을 지닌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떻게 평화의 대의에 지지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인과 관계는 그 평화의 대의 안에서 그 최고 수준에 도달합니다. 단, 하느님의 인과 관계 안으로 끌려 들어감으로써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인과 관계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들을 통한 탄원을 기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평화의 유산에, 초월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평화의 유산에 무감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전한 평화를 건네주는 방법을 모르는 세계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의 유산을 남겨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의 자비가 주는 겸손하고 사랑 넘치는 힘을 갖고 평화를 위한 우리의 기도를 강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마태 7, 7 이하, 요한 14, 27) 이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평화는 가능합니다. 더군다나 평화는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에페 2, 4),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의 사도적 축복이 이에 관한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1973년 12월 8일, 바티칸에서, 바오로 6세 교황 이 글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에서 2021년 4월 출간된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 실린 ‘제7차 평화의 날’ 담화의 일부를 발췌한 글입니다. 전문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홈페이지(www.pu2046.kr) 자료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