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석 베드로 신부(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소장) 가운데에 캐롤 몬시뇰. 선교사 메리놀회 전교 잡지「그 먼 땅에」(The Field A far) 1933년 1월호 표지 사진 메리놀회의 캐롤(George M. Carroll) 몬시뇰과 이승만 대통령의 인연은 태평양 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임시정부의 외교부장 조소앙은 워싱턴에 있던 이승만을 주미외교부 위원장으로 임명했는데, 이 시기에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외교적인 차원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 초반부터 평안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한 캐롤 몬시뇰이 이러한 이승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했던 몬시뇰은 이승만을 자주 방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캐롤 몬시뇰은 이 무렵 ‘망명 애국지사’ 이승만의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런데 1952년 6월에 메리놀회원들이 부산에서 작성한 일기를 보면, 이승만에 대한 변화된 시각을 알 수 있습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사람들은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 강압적인 정부가 그럴듯한 혐의를 씌어서 국회의원들을 체포했다. 헌법에는 국회에 의한 선거를 6월 23일 전에 치르도록 되어있는데, 물론 감옥에 있는 국회의원들은 새 대통령을 뽑는 투표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미국인 선교사들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부산 정치 파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습니다. 일기에서는 정부를 함부로 비판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정권의 비민주적인 행태를 바라보면서 캐롤 몬시뇰은 결국 이승만과 결별한 것으로 보이는데, 유엔 주재 외교관이었던 한표욱이나 임병직에게 보낸 이승만의 편지에는 캐롤 몬시뇰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승만에게 캐롤 신부는 이제 “가톨릭교회와 정부 사이에 선한 일을 창출할 만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고, “가장 악의적인 가톨릭인의 한 명”으로서 “적을 도와주는 일을 너무 많이 행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심지어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캐롤 몬시뇰의 한국 입국을 저지하기 위해 워싱턴에 압력을 넣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이 캐롤 몬시뇰을 공격했던 구실은 그가 줄곧 ‘이적 행위’를 해왔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캐롤 몬시뇰은 한국전쟁 이전에도 남한 정부의 반공노선과 배치되는 구호활동을 전개했었습니다. 제주도 4․3의 현장을 방문하고 열성적으로 구호활동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톨릭구제회’는 해방 이후 1948년까지 북한에도 식량과 물자를 보냈습니다. 38선을 넘어서 이루어진 ‘가톨릭구제회’의 구호 사업은 평양 주재 미군 연락장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가톨릭 구제회에서 한국으로 보낸 구호물자를내리는 캐롤 몬시뇰(오른쪽) ©교회와 역사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주고 있는 코로나19가 우리의 마음까지 완고하게 만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화해의 사명을 가진 한국 천주교회는 ‘적’이 될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열의 악이 극복되는 구원을 위해서 약자들을 연민하는 ‘이적 행위’를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