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미 헬레나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대표, 팍스크리스티코리아 공동대표) 지난 11월호에 이어 『피스빌딩 - 가톨릭 신학, 윤리, 그리고 실천』의 2장인 노틀담 대학 크록 국제 평화학연구소 존 폴 레더락(John Paul Lederach)의 글, “인간성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아래 글은 레더락 교수가 우간다 내전 상황에서 무장 세력과의 대화에 직접 개입했던 메리 로콧 수녀와 나눈 인터뷰 일부다. 메리 타르키시아 로콧 수녀는 그녀를 ‘청소년 엄마’라 부르는 200명 이상의 소녀들을 위해 수녀원 중 한 곳을 훈련 학교로 바꾸고 있었다. 이 어린 여성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 신의 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에 납치되고 ‘아내’로 잡혀, 한 명 이상의 반란군에 의해 여러 자녀를 낳아야 했고, 남수단과 북 우간다 사이의 교전 지역 숲속을 이동하는 힘겨운 생활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우리는 노력 중입니다.” 메리 수녀가 말한다. “그들에게 가능성을 주고, 그들이 스스로를 다시 인격체라고 느끼게 하려고요.” 신의 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 ©The Guardian 북 우간다 킷굼 출신인 메리 수녀에게 전쟁 지역, 고난이나 숲속 생활 같은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15세 때 티 없으신 성모님의 작은자매회(the Little Sisters of Immaculate Mary)에 입회한 그녀는 대부분 북 우간다에서 살면서 동포가 겪은 압도적인 도전을 현장에서 경험했다. 수련기 초, 이디 아민(Idi Amin - 1971년 군사 쿠데타로 우간다 대통령이 된 군인 출신 정치인) 정부의 병사들이 수녀원과 본당을 장악하자, 그녀는 주교의 인솔 아래 수풀 지대와 남수단으로 도망쳤다. 신의 저항군과의 30년 전쟁에서 폭력이 증가하면서 그녀의 공동체는 계속해서 공격을 당했다. 그녀의 친척 수십 명이 죽거나 납치당했다. 신의 저항군은 그녀의 아버지, 형제들 그리고 수많은 사촌을 죽였다. 그녀의 제부는 정부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조카들은 유괴되어 사라져버렸다. 수녀회 공동체의 수많은 수녀가 사라졌다. 지금은 그녀의 여동생이 친족 가운데 과부와 고아가 된 이들을 돌보고 있다. “이곳이 우리 공동체입니다.” 그녀가 말한다.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요.” 북 우간다 ‘글루(Gulu)지역에 있는 성모님의 작은 자매회the Little Sisters of Mary Immaculate of Gulu(LSMIG).’ ©lsmig.org 이 모든 상황과 상황이 초래한 괴로움과 어려움 속에서도, 메리 수녀는 처음이자 그 이후 오랫동안 아촐리 종교지도자 평화이니셔티브(Acholi Religious Leaders Peace Initiative)의 유일한 여성 회원이었다. 메리 수녀는 이 이니셔티브의 회원 자격으로 한 차례 이상 수풀 지대로 들어가 지휘관과 어린 소년병을 찾고, 만나고, 협상하는 자리에 참여했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했다는 사실, 특히 아프리카인의 핵심을 이루던 도덕적 가치를 상실한 것을 애석해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녀의 얼굴 위로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 “치욕이 너무 컸습니다.” 그녀가 말한다. “부모가 살해당하거나 강간당하는 것을 가족들이 지켜봐야 하고, 납치당한 아이들은 끔찍한 상황에 삽니다. 우리는 문화, 도덕성 등,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건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 그녀가 주목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존중심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젖소들이 사람들보다 더 존중받았어요. 젖소는 우유를 주잖아요.” 특히 지난 20년 동안 자행된 신의 저항군의 학대를 감안할 때,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면하고 고향 공동체로 돌아오도록 수용할 수 있었는지 묻자, 그녀는 정말 마땅한 대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해야만 하기 때문이죠.”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들을 투옥시키고 싶어 했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이런 죽음, 살상, 또 그에 이어지는 일들에 지쳐 있었어요.” 그들을 만났을 때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반란군이나 피해자 모두 내 민족의 일부이니, 나는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중죄를 저질렀지만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어떤 일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과 그 모든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들을 한때 잘못된 길로 빠졌던 내 형제자매라고 생각합니다. 제 존재가 특히 신의 저항군 병사, 진자(Jinjas) 지역 사람들, 납치되어 그런 일을 하도록 강요당한 아이들 가운데 일부라도 돌아오도록 인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 일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압니다. 결단을 내려 돌아오십시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도와야 합니다. 소년병들은 “수녀님, 저를 수녀님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제발 저를 그곳으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두고 돌아오면 마음이 아파서 밤잠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맨발인 그 아이들의 발은 돌처럼 딱딱합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감정이라는 게 없습니다. 나는 그게 어떤 상태인지 압니다. 제가 젊은 수련자였던 아민 통치 시기, 주교님께서 우리를 군인들 앞에 남겨 두지 않으려고 수단으로 향하는 숲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셨거든요. 군인들이 오면 우리는 도망쳤습니다. 부활절 일요일이었는데. 우리는 숲으로 도망쳐 며칠이나 숨어 지냈습니다. 숲에서의 생활은 정말 너무 힘들어요. 이 젊은이들은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합니다. 나는 내 동포들에 대해 정말로 강한 사랑을 느낍니다. 북 우간다 성모님의 작은 자매회와 아프리카 신앙과 정의 네트워크(African Faith and Justice Network)와의 워크샵©북 우간다 성모님의 작은 자매회 페이스북 메리 수녀의 활동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확실히 끝내는 옹호의 한 형태이며, 그것은 폭력을 저질렀던 사람들도 공동체의 일부로 생각하면서 그들과 관계 맺도록 이끈다. “그들, 피해자들이 언제나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그들을 옹호해야 하고, 그들을 만나 위로하고, 언젠가는 ‘주님이 우리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수녀회 회원들과 장상들은 ‘메리 수녀님, 계속하십시오. 수녀님은 용기 있는 분이니까요.’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해야 합니다.” *2021년 한 해동안 「평화를 배우다」를 연재해 주신 박은미 헬레나 선생님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