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빈 멜라니아(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샬롬회 회원) 과세 안녕하십니까? 조금 낯선 인사이지요? ‘과세(過歲)’란 설을 쇤다는 뜻으로 새해 안부를 여쭙는 인사입니다. 「우리말 우리 문화」 사전에도 수록된 이 인사를 제가 처음 들은 것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였습니다. 그곳에는 동포들이 다니는 ‘조선학교’가 있고, ‘재일조선인’들이 사는 마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서른 해를 보낸 제가 새해 인사를 일본에서 처음 배운 경험은 재일조선인에 관한 여러 정보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곳에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 안에 전해지던 아름다운 우리말, 정겨운 우리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것들이 우리 안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렸고 사라져가는 것들입니다. 조선학교를 방문한 많은 이들이 “그곳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저에게 그 무언가는 분단 이전 이 땅이 그리고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던 어떤 본질이었습니다. ▲재일동포들을 삶을 다룬 영화 ‘박치기’에 등장하는 조선학교 교복을 입은 주인공들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 ‘재일조선인’이라는 단어가 낯선 분도, 조금은 불편한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재일한국인’이라 말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저도 몇 번이나 받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이 ‘재일한국인’이 아니고 ‘재일북한인’도 아닌 것은 자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 사람들은 해방 후에도 여러 사정으로 일본에 남아야 했습니다. 조국 해방의 기쁨에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이 이국에서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지켜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떠나 온 나라는 남도 북도 아닌 ‘조선’이라는 하나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재일조선인이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 대신 ‘조선적’이라는 임시 국적 상태로 남았습니다. ‘조선적’은 일본 내에서는 특별영주자로 분류되지만 사실상 무국적과 다름없습니다. 일본 사회에 동화되는 것도, 분단된 조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할 수 없었던 재일조선인들은 대를 이어 일본 사회의 차별에 맞서며 조선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시기 일본으로 건너온 이들이 1세대라면 지금은 재일조선인 3세, 4세가 민족 사회의 중추로 활동하고 있고, 요즘은 5세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고유한 민족 공동체가 이국에서 흡수되지 않고 오랜 세월 대대로 이어지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고 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조선학교’ 덕분입니다. 조선학교는 70년이 넘는 지난 세월 수많은 재일조선인이 배우고 자란 터입니다. 조선학교에서 아이들은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배우며 일본 사회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교육받습니다. 동포 4세, 5세인 아이들에게는 ‘조선학교’가 곧 고향이라고들 합니다. 자신을 자신으로 길러낸 곳, 추억과 동무들이 있는 곳, 생각하면 그립고 정다운 곳이 곧 조선학교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조선학교를 경직되고 폐쇄적인 곳으로 생각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실제로 보고 느낀 조선학교는 오히려 아이들이 그 자신으로 온전히 자랄 수 있도록 돕는 안전하고 따뜻한 공간입니다. 한 학년에 고작 두세 명인 급우들은 형제처럼 지내고, 아이들은 동포 사회 전체의 따뜻한 관심 속에 자라납니다. ▲조선학교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 속 홋카이도 조선학교 아이들새로운 세계, 새로운 배움 제가 처음 재일조선인과 만난 것은 일본 예수회가 운영하는 시모노세키 노동교육센터를 취재차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시모노세키는 지금도 부산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있을 만큼 한국과 가까운 곳으로 수많은 재일조선인 1세가 배를 타고 처음 닿은 일본 땅 역시 시모노세키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시모노세키에는 재일조선인 공동체와 조선학교가 단단히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노동교육센터는 재일조선인이 일본 사회에서 겪는 차별에 함께 맞서며 재일동포와 일본 그리고 한국 사이 다리가 되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일본의 한 조선학교 교실 사진 노동교육센터의 활동을 취재하기 위해 처음 방문한 조선학교에서 받은 인상은 경험해보지 못했건만 분명 기억하고 있는 어떤 고향에 돌아온 것만 같은 기시감이었습니다. 그 후 한일 예수회 간 연대의 거점이 되는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로 자리를 옮기면서 시모노세키 지역 조선학교를 자주 방문하고, 동포들과 교류하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서강대학교 학생들과 조선학교 아이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동반하기도 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재일조선인과 만나고 교류하게 되었지만, 이 만남은 제게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감사하고 특별한 기회였습니다. 특히 저는 이 만남을 통해 민족, 화해, 통일, 평화, 인간 존엄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깊게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저 하나의 개념으로 느껴지는 이 단어들이 구체적인 삶 안에서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게 되는지, 어떻게 이 말들은 때로는 고통이, 때로는 희망이 되는지 깨닫는 배움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몇 번의 방문과 만남으로 제가 받은 인상을 섣불리 나누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항상 오해와 차별에 맞서야 했던 분들의 이야기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지면을 통해 나누는 것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지식이나 판단보다는 만남을 통해 제 안에서 더 깊어진 고민과 성찰이 될 예정입니다. 지난 몇 년 간 저를 사로잡았던 ‘내가 만난 재일조선인’ 이야기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새로운 질문과 고민을 건넬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