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원 (북한대학교대학원 박사수료) 철수와 영희 남북을 통틀어 철수와 영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영희는 최근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신스틸러로 등장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죠. 영희와 철수는 ‘깐부’로서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의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그래서인지 현실의 남과 북에서도 영희와 철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북한에서 태어난 제가 영희와 철수만큼 많이 들은 이름은 은주와 김혁입니다. 어느 학교에 가든, 어떤 회사에 가든 은주와 김혁이가 한 명쯤은 꼭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1980년대 북한에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던 영화 “조선의 별” 때문입니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사를 다룬 영화 “조선의 별”(10부작)은 북한에서 수령형상 문학의 첫 번째 작품으로, “귀중한 문예 재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조선의 별”이 북한 주민들 속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리면서 영화 1부와 2부의 주인공인 은주와 김혁이도 덩달아 사랑을 받았고, 덕분에 1980년대에 태어난 북한의 아기들 가운데 상당수가 은주와 김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선예술영화 「조선의 별」 ©사진 2013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영화의 영향력은 이름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2부가 끝날 즈음 주인공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있는데,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통해 이 장면이 수없이 패러디되었습니다. 여주인공 은주가 일제의 총에 맞아 쓰러지자 남주인공 김혁이 “은주, 은주! 죽으면 안 되오!”라며 오열하는 장면, 그리고 혁명가 김혁이 조선독립과 함께 김일성의 존재를 선전하는 짤막한 연설을 한 후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삐라를 뿌리고 발코니에서 뛰어내려 자결을 선택하는 장면은 오랫동안 북한 주민들 속에서 회자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었는데, 휴식시간에 누군가 잠들면 짓궂은 학생들이 다가가 “은주, 은주 죽으면 안 되오!”라며 깨워대 친구들의 나무람을 샀고, 심지어 어떤 학생은 책상 위에 올라서서 A4용지를 몇 장 흩뿌리면서 “겨레여, 삼천리 조국 강산에 동이 터 온다. 곧 방학이니 그대들은 공부에서 해방될 것이다.” 등 영화 속 대사와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엮어 친구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습니다. 문화의 영향력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북한은 올해 들어 외부문화에 대한 단속과 북한 주민들에 대한 사상교양사업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김정은 집권 초기에만 해도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며 문명강국 비전을 제시하고 최고 수준의 향유를 약속했던 북한당국의 분위기는 최근 사뭇 달라진 모습입니다. 기층 당조직 강화를 명분으로 핵심당원들과 선동원들의 역할에 힘을 실어주고 있으며, 이들이 직접 생산현장에 내려가 근로대중을 선전·교양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시대 변화와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는 새로운 예술작품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지난 6월 당중앙위원회 8기 3차 전원회의 이후 김정은 위원장 참석하에 진행된 국무위원회 연주단공연을 문화예술 분야의 시범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앞선 1월 8차 당 대회 축하공연에 비해 사상성이 강조된 특징이 있습니다. 전원회의 공연이 8차 당대회 축하공연에 비해 규모가 작다는 것을 감안해도 축하공연에서 보여주었던 역동성이나 새로움 대신 사상성이나 김정은의 우상화가 강조된 신곡 위주로 편성된 것은 아쉽습니다. 조선중앙TV 화면(2021.06.22.) ©연합뉴스 당원들과 선동원들을 동원한 직접적인 사상교양보다는 영화, 소설 등 문학예술 작품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북한당국이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상당 기간 ‘한류’를 접하면서 높아진 북한 청년들의 수준을 만족시키는 것 또한 쉽지 않아 보입니다. 최근 북한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이렇다 할 작품들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단지 ‘경제적인 이유’나 어려운 환경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당에서 요구하는 ‘사상성’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청년세대들의 마음을 울리는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기엔 사회체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이 너무 심각한 것은 아닐까요? 향후 남북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날이 온다면 문화적 갈등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제적 차이도 문제지만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북한 문화가 외부문화와 부딪쳤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갈등들을 미리 생각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같음을 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름이 존중받는 환경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2021년 격월로 연재된 정다빈 멜라니아 선생님의 「내가 만난 재일 조선인」과 장혜원 선생님의 「내가 만난 남한」은 2022년부터 「내가 만난 남한」의 새로운 기획으로 연재됩니다. 2021년을 함께해 주신 정다빈 멜라니아 선생님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