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희 안젤라 (연세대 정치학 박사수료) 긍정도 부정도 그 무엇도 종전선언 논의와 관련해 최근 가장 주목을 끌었던 이슈는 일본의 반응이었다. 일본 미디어 교도통신에 따르면 현 정부가 제안하고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종전선언에 대해 일본 정부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뉴스가 보도된 이후 사실인지 확인하는 기자들의 후속 취재에 대한 피드백으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는(Neither Confirm Nor Deny·NCND)’는 의미로 답변을 회피했다. 명확한 입장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NCND를 선택했다는 것은 사실상 그렇다는 여지를 남겼다고도 볼 수 있다. 일본 관방부 정례회견을 하고 있는이소자키 요시히코 관방 부장관 ⓒ NHK 왜 일본은 한반도의 종전선언에 난색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북한의 핵문제가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종전이 논의되는 것이 부담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가 식민지와 피식민지라는 과거사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북한의 핵증강은 남한보다 일본에게 더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북한이 동족 간 전쟁을 치렀다는 과거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바로 이 동족이라는 이유로 인해 양자 간 화해를 민족의 과업이라 여길 만큼 나름의 애틋한(?) 정서를 공유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끔 한반도의 두 개의 코리아가 유독 일본과의 관계에서 합이 잘 맞게 대응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독도 문제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인데, 일본이 독도를 한국이 무단 점유 중이라는 주장을 펼칠 때다. 한국 정부가 여러 외교적 사항을 고려해 쉽게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는 데 반해, 북한 정권은 거침없이 일본을 비난하는 성명을 왕왕 발표한다. 한반도에서 ‘민족’의 문제, 특히 식민지배를 경험한 일본에 한해서는 동북아시아의 외교안보환경이 ‘한·미·일’ 기둥과 ‘북·중·러’ 축으로 이분화되어 작동되고 있는 것과 별개로 남북 간 정서적 공조가 나타나는 셈이다 ⓒ MBC 뉴스 일본 입장에서는 한반도와의 관계가 참으로 어렵다. 미국을 매개로 외교안보는 물론 경제 산업부분까지 긴밀하게 연결된 한국이라지만, 한국은 일본이 묻어버리고 싶어하는 과거에 대한 문제제기를 지속한다. 아직 수교를 맺지 못한 북한은 일본 본토를 넘어서는 미사일까지 개발을 마친 상황이다. 일본이 우려하는 시나리오 중 하나는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북관계가 대폭 개선되어 두 개의 코리아가 암암리에 공동의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자국을 원자탄으로 위협하는 것일 테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북한의 핵무기가 완벽하게 폐기되지 않는다면, 일본 입장에서는 남북 간 긴장상태가 관계개선보다는 상대적으로 자국 안보에 덜 부정적이다. 적어도 북한의 핵이 조준하는 지점이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 이남 지역일 것이기에. 온전한 종전과 동북아 평화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으로 본토에 핵을 2번씩이나 맞은 세계대전 전범국인 일본이 전후 이들의 정체성과 경제력을 완벽하게 재건해낸 배경에는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관련된 여러 현안이 연계되어 있다. 식민지배 기간에 조선에서 활동했던 일본군 출신이 미군과 유엔군에 한반도 지형 정보를 제공하는 등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하였고, 미군 및 연합군의 전쟁 물자를 발주, 제공하는 방법으로 경제 특수를 챙길 수 있었다. 한반도에는 비극이었던 6·25 전쟁이 일본에겐 축복이자 기회였던 것이다. 패전 이래 일본은 특유의 근면성과 장인정신으로 영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초토화된 사회를 재건하고 중국 부상 이전까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경제력이 강한 부국이 된다. 이들의 재건서사는 전무후무하게 핵 공격을 받은 ‘유일한’ 피폭국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일본을 전쟁의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바꾸었다. 패전한 전범국이었기에 강제적으로 징벌적 차원에서 전쟁 포기, 전력 포기, 교전권 부인 등 이 세 가지 규범을 골자로 한 평화주의원칙이 일본 헌법에 명시되었다. 보통국가라면 자조(self-help)를 위해 응당 지닐 수 있는 군대마저 공식적으로 보유할 수 없게 되었지만 외려 일본은 이런 자신의 외교안보적 상황을 이미지 개선에 활용해 낸 셈이다. 상징적으로 1955년부터 현재까지도 매년 열리는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는 반핵운동에 동참하는 전 세계인들이 찾아와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시민을 추모하고 핵전쟁을 반대하는 행사다. 전범국의 이미지보다 원자폭탄의 피해자이자 전 세계에 반핵평화주의를 주장하는 평화의 나라, 폐허가 된 땅을 비옥하게 부활시킨 경제 강국, 친절하고 원칙을 따르는 아시아의 모범 국가라는 타이틀은 이 나라가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온 대외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조를 넘어, 평화헌법에서 제한해 온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화가 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하는 것 역시 이들의 과제였다.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 ⓒ 뉴시스 =환경재단 제공 이런 일본에게 꾸준히 동해안에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해 온 북한은 군력을 증강하기에 좋은 명분이 되었으며, 북한과 관련된 식민지배의 비윤리적 과거사 문제도 요코타 메구미를 비롯한 다수의 일본 민간인 납북 문제로 일정 수준 상쇄되었다. 일본 정부는 북핵능력이 고도화되자 이를 빌미로 평화헌법 개정을 논의해 왔다. 더불어 북한이 북일수교의 조건으로 식민지배 배상 문제를 제시할 때 일본은 납북된 일본 민간인 문제로 대응해 왔다. 북한에게 역사적 가해를 해 온 일본이 납북자 문제로 피해자가 된 것이다. 한일 간 갈등의 골이 깊은 것처럼, 북일 간에도 서로 좁히기 어려운 상호 질시의 공간이 존재한다. 문제는 한반도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 될 종전선언에 이미 일본이 비협조적인 입장을 어느 정도 밝혔다는 점이다. 과거 식민지배 배상과 북핵, 민간인 납북 등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중첩된 현안들을 한번에 해결할 방법을 찾기란 요원하다. 그럼에도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배경적 맥락이 작용하는지 관심을 거두지 않는 것,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세는 변함 없이 유지해야 할 것이다. 두 코리아와 일본, 멀고도 가까운 이 세 행위자들이 진정으로 화해할 수 있는 날이 올 때 한반도의 종전과 이로 인해 파생될 동북아시아의 평화도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