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실제 무기들제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바오로 6세 교황 (1975. 10. 8. 발표) 여러분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전대미문의 그리고 치명적인 참화의 공포,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실제로 인류를 거의 절멸시킬 수 있는 이 공포가 여러분의 무기입니까? 압제를 견뎌야 하는 상태로 전락시키는 것이, 폭력으로 시작하고 냉혹하게 안정화되며 끔찍할 정도로 무제한 지속되는 식민주의, 제국주의나 혁명 같은 상태로 떨어트리는 것이 무기입니까? 예방 무기와 비밀 병기들이 무기입니까? 배고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복당했으면서도 조용히 있어야 하는, 그런 자본주의 조직, 곧 경제 세계의 자기 본위적인 조직이 무기입니까? 자기의 역사적 문화만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주제넘게 확신하는, 그런 역사 문화에 자아도취적으로 매혹되는 것이 무기입니까? 혹은 국제 관계를 합리적으로 다루고 조직하는 일에 몰두하는 근사한 구조적 건조물들이 무기입니까? 그런 토대들로만 지탱되는 평화, 그런 평화가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 평화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 평화가 열매를 잘 맺습니까? 이 평화는 축하할 만한 것입니까?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저의 메시지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평화에 다른 무기들, 곧 인류를 살상하고 절멸하려는 목적을 가진 무기들과는 다른 무기들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도덕적 무기들입니다. 이 도덕적 무기들은 국제법에 힘, 위엄과 신망을 부여합니다. 국제법은 조약 준수의 맨 앞자리에 있는 무기입니다. “조약은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국가들 사이의 실효적 관계들을 일관되게 유지하기 위해, 민족들 간 정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인민들의 똑바로 선 양심을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유효한 금언(金言)입니다. 평화는 이 자명한 원리를 자신의 방패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조약들이 정의를 반영하지 않는 곳에선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곳에서는 마땅히 새로운 국제 제도들, 자문을 위한 중재자들, 연구들, 그리고 숙고들이 있어야 할 정당성이 인정됩니다. 이런 것들은 반드시 맹목적이고 통제되지 않는 힘들 사이의 논쟁, 다시 말해, 이른바 기정사실로 내세우는 방식들을 철저히 배제해야 합니다. 이 방식들은 언제나 인명 피해와 계산할 수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파괴를 앞세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방식들은 참으로 정당한 명분을 유효하게 입증하려는 순수한 목적을 좀처럼 달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무기들과 전쟁들은 한 마디로 문명화 프로그램에서 배제되어야 합니다. 분별력이 있는 무장해제는 평화의 또 다른 무기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 2,4)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읍시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이것이 이상입니까?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 (중략) 이것은 이제 단순하고, 순진하며 위험한 이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인류의 새로운 율법입니다. 그 인류는 “너희는 모두 형제”(마태 23,8)라는 매우 뛰어난 원리로 평화를 무장시킵니다. 만일 보편적 형제애가 참으로 사람들의 마음으로 뚫고 들어오고 있는데도, 여전히 무죄한 그들의 형제들을 맹목적이고 광적으로 죽이는 자들이 될 정도로, 그리고 평화에 공헌하는 것으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처럼 말로 다 할 수 없는 대규모의 학살을 범할 정도로 무장해야 할까요? 그리고 사실 우리 시대에는 간디 같은 약한 한 사람이 보여준 모범이 있지 않습니까? 비폭력의 원리로만 무장한 간디는 수억 명에 이르는 인도에 새 인민의 자유와 존엄을 입증해보이지 않았습니까? 문명은 올리브 가지로만 치장한 평화의 발자국을 따라 걷습니다. 문명은 무거운 법전집(法典集)을 지고 가는 동방박사들을 따라가는데, 이 법전은 이상적인 인간사회로 우리를 이끌 것 입니다. 이 이상적 인간사회는 정치인들, 곧 전쟁에서 이겨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이들을 억압하기 위해 완전 정복의 무력을 계산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미덕과 우애의 심리를 위한 자원을 평가하는 전문가인 그런 정치인들을 따릅니다. 정의도 질서 잡힌 행진 안에서 움직이는데 이 정의는 더 이상 교만하고 무자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폭력을 행사한 이들을 단죄하며, 질서를 보장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이 질서 정연한 행진을 하기는 대단히 어렵지만, 이 행진만이 거룩한 이름, 곧 ‘자유와 의식적인 의무 안에서 이뤄지는 질서’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기뻐합시다. 이 행진은, 비록 적의 침탈과 예기치 못한 사고로 가로막힐지라도, 이 비극적인 시대에 우리가 보는 가운데 그 길을 따라 계속됩니다. 행진의 발걸음이 어쩌면 약간 느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발걸음은 분명하고 전체 세계를 위해 유익합니다. 이 행진은 평화의 진짜 무기들을 이용하는 데 전념하는 그런 행진입니다. 이 메시지도 반드시 복음의 추종자들과 복음의 종들이라 합당하게 불리는 이들을 위한 부록(appendix)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 부록은 어떤 무기든 다 없애버리고 오로지 선과 사랑으로만 무장된 평화라는 이 주제와 관련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분명하고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지 상기시킵니다. 1975년 10월 8일, 바티칸에서, 바오로 6세 교황 *** 이 글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에서 2021년 4월 출간된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 실린 ‘제9차 평화의 날’ 담화의 일부를 발췌한 글입니다. 전문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홈페이지(www.pu2046.kr) 자료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