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석 베드로 신부(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소장) 한국 천주교회는 200주년(1984년)을 준비하면서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북한선교부’를 출범시켰다. ‘북한선교부’는 1985년에 ‘북한선교위원회’로 개칭했고, 1999년부터는 민족화해위원회로 다시 명칭을 바꾸었다. 200주년 당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방한을 앞두고 바티칸에서 북한에 있는 신자들에 대한 질의가 있었고, 이는 남한 천주교회가 북한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해방 직후의 통계를 보면, 북한 지역에는 5만 5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 2000년 대희년 당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대회.© 가톨릭평화신문 DB 현재는 전국 모든 교구에서 민족화해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 평화를 염원하는 기도를 바치고, 남북의 협력을 위해 노력하는 각 교구의 민족화해위원회는 탈북민을 동반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평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민족화해학교’ 등 교육에도 주력하는데, 분단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북한만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면에서 보면 평화 교육이나 화해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 www.crs.org 1943년에 설립된 미국의 가톨릭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s)는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중동 및 동유럽의 110개 이상의 국가에서 1억 3천만 명의 사람들을 지원하는 단체이다. 과거 CRS는 인도적인 지원 사업에 주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1994년에 발생한 ‘르완다 대학살’은 CRS의 활동에 새로운 전환(Tipping Point)을 가져왔다. CRS에 오래 근무한 마이클 웨이스트(Michael Wiest)는 르완다 대학살이 불러일으킨 조직의 위기를 보면서 “가톨릭 기관으로서 어떻게 우리가 증오와 불신의 문제를 우리 사명의 일부로 보지 않았을까요? 그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가 생명과 존엄성, 그리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다른 투쟁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투쟁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일까요?”라고 말한다. 이런 성찰을 통해서 1990년대 CRS는 교회의 사명이 단순한 ‘인도적인 지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분쟁으로 인해 ‘불타버린 집’과 ‘식량 부족의 현상, 자체만을 다룰 것이 아니라, 갈등의 징후를 잘 감지해야 한다는 점을, 그리고 분쟁을 일으키는 빈곤의 원인인 억압적인 제도와 구조에 맞서야 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얼어붙은 한반도에서 코로나19 상황까지 민족화해위원회의 활동을 가로막는 장벽들이 있다. 새해에도 ‘대북지원사업’이나 ‘북한선교’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민족화해위원회의 활동은 좁은 의미의 ‘북한선교’나 ‘인도주의 지원 사업’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한반도 전체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새롭게 시작되는 2022년에는 갈라진 이 땅의 민족화해위원회가 화해의 사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