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선 벨라뎃따(평화사도 1기 & 동화작가, 평화운동가) 올해는 검은 호랑이해이다. 우리 가족 중에 85세의 엄마와 25세의 아들이 호랑이띠라 그런지 호랑이가 무서운 것 같은데 왠지 친근하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울 때였거든,’ 나도 옛이야기를 시작할 때마다 호랑이를 팔곤 했다. 호랑이는 단군왕검의 엄마인 웅녀와 동굴 속 동기동창이었다. 웅녀가 사람이 되기 전 호랑이와 함께 동굴 속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동고동락(同苦同樂)했다. ‘호랑이와 곶감’, ‘호랑이와 팥죽 할머니’, ‘해님 달님’,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호랑이도 사나운 것 같은데 불쌍하다. 호랑이가 신화나 전설, 옛이야기에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백호가 등장하고, 고려 시대에는 국교인 불교의 불법을 지키고 보호하는 동물로 섬겼다. 조선 시대에는 궁에서 왕이나 왕비의 시신을 모시는 빈전에다 사신도를 그렸는데, 그중 한 마리가 백호였다. 연암 박지원이 쓴 소설 ‘호질’에서는 호랑이가 타락한 양반을 꾸짖는다. 원주 동화리 노회신의 묘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사신도 벽화. © 경향신문 호랑이가 우리나라 창조 신화부터 생활 곳곳에 등장한 걸 보면, 그만큼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많았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그 많았던 호랑이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나라 호랑이는 일제강점기(1914- 1917년) 일본에 의해 절멸되었다. 우리 민족의 기상이 호랑이와 닮았다고 민족의 혼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겠다며 호랑이를 절멸시킨 것이다. 남과 북, 우리나라 지도가 호랑이 형상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 지금은 동물원이나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호랑이라니,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김홍도,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호랑이 작품 하면 뭐니 뭐니 해도 김홍도의 「소나무 아래 호랑이(송하맹호도, 松下猛虎圖)」가 으뜸이지 않을까? 옛 그림은 품고 있는 이야기가 참 많다. 「송하맹호도」에 등장하는 호랑이도 언뜻 보면 눈에서 불이 나는 듯 무섭다. ‘긴 몸에 짧은 다리, 소담스럽게 큼직한 발과 당차 보이는 작은 귀, 넓고 선명한 아름다운 줄무늬, 천지를 휘두를 듯 기개 넘치는 꼬리, 세계에서 가장 크고 씩씩하다는 조선 범이다’.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솔 출판사, 2005) 어찌나 실감나는지 당장이라도 그림을 뚫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올 것 같다. 송하맹호도의 호랑이를 확대해서 보면 입이 쩍 벌어진다. 가는 바늘보다 더 가는 붓질로 호랑이 터럭을 그려 넣었다. 인내와 끈기는 물론이고 깊은 정신적 수양 없이 누가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림과 관련되어 호랑이의 나이, 소나무에 난 생채기에 관한 얘기도 하고 싶지만 참아야지.) 김홍도, 「표피도(豹皮圖)」 김홍도가 그린 「표피도(豹皮圖)」 역시 확대해서 보면 수만 번의 붓질을 해서 표범 무늬를 그렸다. 어찌나 정교한지 털 한올 한올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옛 그림 강의를 듣다 우연히 보게 된 「표피도」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나는, 왜 김홍도 김홍도 하는지 위대한 거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이 「표피도」가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니, 어여 통일이 되기를 사심 가득한 기도를 드렸다. 옛사람들은 호랑이(표범) 가죽을 무척 좋아했다. 무늬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잡귀를 쫓아내기 때문이었다. 혼례 때 신부가 타는 가마의 덮개로 호피를 사용하였고, 이불로 덮기도 했다. 나라에서도 교역품이나 외국 사신들에게 예물로 보냈고, 신하에게 호피 방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동물 권리를 얘기하는 마당에 「표피도」가 다소 불편하겠지만, 조선 시대라는 시제를 감안하시길 당부드린다. 주역의 64괘(卦) 중 49번째 괘가 혁괘(革卦)이다. 바꾼다는 의미의 혁으로, 대인호변(大人虎變), 군자표변(君子豹變), 소인혁면(小人革面)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인호변은 호랑이 털이 가을이 되어 더욱 빛나듯 천하를 새롭게 바꾸고, 군자표변은 표범의 털이 가을날 빛나는 무늬로 탈바꿈하듯 군자도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 소인혁면은 낯짝만 바꾼다는 뜻으로, 자신의 이기심과 명예욕 때문에 신념과 절개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얼굴색을 수시로 바꾸어 돌변한다는 뜻이다. 어린 호랑이(표범) 무늬는 흐릿흐릿하고, 털갈이 직전에는 털 상태가 부스스하다. 자라면서 몇 번의 털갈이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무늬가 선명해지고 몰라볼 정도로 아름답게 변한다. 대인호변, 군자표변은 개혁(改革), 변혁, 혁명, 혁신, 회심이라 이름할 수 있다. 행동이나 말을 순식간에 싹 바꾸어 돌변(突變)하는 소인이 되지 말고, 완전한 털갈이를 통해 자신을 개혁하여 새롭게 되라는 김홍도의 당부이다. 새해가 시작되었고, 새 지도자를 기다리는 오늘, 대인(大人)과 군자(君子)의 등장을 간절히 바라 본다. 범 내려온다.범이 내려온다, 장림 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누에머리 흔들며,전동 같은 앞다리,동아 같은 뒷발로 양 귀 찌어지고,쇠낫 같은 발톱으로 잔디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르 흩치며,주홍 입 쩍 벌리고 워리렁 허는 소리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난 듯,자래 정신없이 목을 움추리고 가만히 엎졌것다.(범 내려온다 / 이날치 밴드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