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권 안드레아 신부 (원당성당 주임 신부) 추운 겨울이 되면, 빨갛게 타오르던 연탄불이 떠오릅니다. 원래 장작을 때던 시골집에서 연탄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불을 때던 아궁이에 바퀴 달린 연탄 화로를 긴 쇠 부지깽이로 아랫목 구들장 아래까지 깊숙이 밀어 넣어 방을 데웠습니다. 아버지는 밤이 되면 ‘이제 장작이 아니라 연탄을 지고 잔다.’고 농을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연탄 좀 갈아라~’ 하시면 서로 미루다가 가위바위보까지 동원했습니다. 아래에 있던 다 탄 놈을 꺼내고, 위에 있던 것을 아래에 넣고, 다시 새까만 새 연탄을 요리조리 구멍을 맞춰 올려놓다 보면, 찬바람과 매캐한 연기에 눈물 콧물 다 쏟아야 했습니다. 눈사람 얼굴에 시커먼 연탄 가루를 바르기도 하고, 미끄러운 눈길에 연탄재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연탄불에 구워주시던 고등어의 바삭한 껍데기도 떠오릅니다. 아, 연탄가스 마시고 옆집 할머니가 가져다준 동치미 국물의 시원함도 잊을 수 없습니다. 참 많은 추억이 연탄이라는 말 하나에 줄줄이 나옵니다. 연탄 하니까, 2010년 1월 말에 북녘동포 연탄 나누기에 함께 했던 일도 생각납니다. 우리 교구 민화위에서 지원한 연탄을 갖고 방북하는 데 따라갔습니다. 방북 신청을 하고 온라인으로 방북 교육을 받은 다음 방북용 신분증을 받았습니다. 당일 아침 일찍 임진각 출입경 사무소(남북 사이는 국경이 아니라 경계선이라 이렇게 부른다 했습니다.)에 도착해 일행을 만났습니다. 잠시 뒤에 연탄을 실은 트럭들이 도착하자, 출경 심사를 받고 준비된 버스에 올라 비무장 지대로 들어섰습니다. 유엔군의 인도를 받아 가다가 남북을 가르는 붉은 선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던 북한군의 차량을 따라 북한 땅으로 들었습니다. 그냥 선 하나인데, 단지 하나의 선인데, 그 선을 넘는 과정이 복잡했습니다. 남측에서와 같은 입경 심사를 받고, 개성공단을 지나 드디어 북한 주민들이 사는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5분여의 거리를 가서 어느 간이역에 우리가 탄 차가 멈춰 섰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 가까이 있었는데, 어릴 적 살던 시골 마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시멘트 블록을 쌓아 올린 벽 위로 기와를 얹은 집과 그냥 슬레이트를 올린 잿빛 집들이 서로를 껴안은 듯 앉아 있었습니다. 2010 민화위 신부님들과 함께한 ‘북녘동포 연탄 나누기’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와서 우르르 내렸습니다. 연탄 하역 작업을 하러 온 이들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트럭 위에 올라선 이들이 연탄을 내려주면 주욱 늘어선 이들이 그 연탄을 전달해서 쌓는 작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주고~ 받고~ 받으라요~ 받으시오~ 하나 둘 박자를 맞춰 땀 흘리며 일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그저 함께 일하는 동료요 벗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남과 북을 가르는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선도 없었고 어떤 분열의 언어도 없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자리, 서로 장단을 맞추고 합을 맞추는 협동의 일터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작업을 얼추 마무리하고 나서 간식으로 준비해 간 인스턴트커피와 초코파이를 나눠 먹었습니다. 많은 말을 나눌 수는 없었지만 서로 고생했다며 주고받는 말 속에 우리는 한민족이요 형제라는 깊은 동질감이 담겨 있었습니다. 2010 민화위 신부님들과 함께한 ‘북녘동포 연탄 나누기’ 그것도 잠시, 가야 한다는 말에 다시 버스에 올라야 했습니다. 차가 출발하는데, 저기 마을 집들 뒤로 트럭들이 더 보였습니다. 우리가 떠나고 나면 연탄을 싣고 갈 차들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북녘에서는 연탄을 받으면 바로 줄 톱을 이용해 가로로 삼등분해서 저녁에만 피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트럭 바닥의 가루까지 싹싹 긁어 담아갔는데, 연탄 가루를 물에 개서 조개탄처럼 만들어 쓰기까지 한다는 말도 이어졌습니다. 그저 두어 시간 타고 말겠지만 그마저도 없으면 찬 방에서 자야 한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 형제, 내 벗이 그렇게 산다면 과연 나는 잠을 제대로 자겠는가?’ 답답함과 미안함, 또 잊고 살아갈 자신에 대한 죄책감, 여러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2010 민화위 신부님들과 함께한 ‘북녘동포 연탄 나누기’ 제가 갔던 연탄 나눔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후로 여러 제재가 등장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개성공단만이 아니라 남과 북을 이어주던 여러 활동들이 여전히 정지 상태로 있습니다. 서로를 이어주던 협동은 사라지고 경계를 가리키는 저 붉은 선은 더 굵어진 듯합니다. ‘내 등 따습고 내 배부르면 남 춥고 배곯는 사정을 모를 수 있다.’던 아버지의 말이 귓전에 울립니다. 2010 민화위 신부님들과 함께한 ‘북녘동포 연탄 나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