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과 중국 관계의 역사

교황청과 중국 관계의 역사발행일: 2018.11.27. 2022년 「평화의 길」 특별 기획으로 이웃 국가 중국의 ‘천주교회’의 역사와 오늘날의 모습, 그리고 바티칸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관련 칼럼을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글의 영역본은 예수회 교양지 「치빌타 카톨리카」(La Civiltà Cattolica)의 <교회 생활Church Life> 코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laciviltacattolica.com/the-history-of-relations-between-the-holy-see-and-china/) 19세기 이후 교황청과 중국의 관계는 아편전쟁에서부터 중국에서의 프랑스 선교보호권(이하 보교권), 극적인 의화단 사건에서부터 외교 관계 수립, 마오쩌뚱(Mao Zedong)의 등극에서부터 새 정권의 개혁을 거쳐, 오늘날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운명의 변화를 겪어왔다. 주요 단계를 살펴보면 복잡한 역사를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서구의 제국주의와 프랑스의 보교권 제1차 아편전쟁(1839-1842) 이후, 중국 제국의 약화와 ‘불평등 조약’으로 초래된 중국 내 서구 열강의 정치, 군사, 경제력 행사라는 상황 속에서, 천주교 선교지역에 대해 프랑스 보교권이 수립되었으며 외국인 및 중국인 천주교 신자 모두를 대상으로 하였다. (1844년과 이후 1856년 체결된 황푸조약)프랑스(유사한 권위 문제가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에서도 발생했지만, 특히 천주교의 경우)와의 관계로 인해 중국 사회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교가 외국 종교로 인식되게 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외국인 혐오로 이어졌다. 이것이 의화단 사건에서 비극적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교황청은 방인 성직자[1] 양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19세기 중반부터 교황청과 중국 관계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레오 13세가 재위했던 1886년, 중국인들의 주도로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교황 대사를 보내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 정부의 반대뿐 아니라 프랑스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선교에 대한 일반적인 후원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보교권이 교회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1900년-1901년 약 30,000명의 천주교 신자가 학살된 의화단 사건에서 폭발한 외국인 혐오는, 한편으로 당시 중국 정부에 의지할 수 없었던 상황을 감안했을 때 보호 장치의 필요성을 보여주었고, 다른 한편으로 서구의 보교권은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증오를 가중시켰다.[2]1912년 중국 제국이 막을 내리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1] 참조. 그레고리오 16세의 선교사 지침 “Neminem profecto”, 1845년 발행[2] 1904년 치빌타 카톨리카에 익명으로 게재된 미래 국무원장 가스파리 추기경의 기사는 프랑스 보교권이 골칫거리 과거 유산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천주교 선교에 대한 새로운 견해: 베네딕토 15세와 비오 11세 베네딕토 15세(1914-1922) 교황의 시대는 매우 신중한 접근 방식을 취했고, 선교 문제와 식민시대 교회의 인식을 극복할 필요성에 있어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 중국은 이 같은 상황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외국 종교로 인식되어서는 안되었다. 베이징은 교황과의 외교적 관계를 위한 계획을 재개했다. 로마는 긍정적으로 응수했고 비 그리스도교 국가와의 외교적 관계를 맺을 권리를 확인하려는 목표를 세웠지만, 프랑스가 베이징에 압력을 행사했고(프랑스는 교황청과의 외교적 관계가 단절되어 1921년에야 재수립 했으므로, 교황청에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음) 외교 관계 계획은 연기해야만 했다. 1919년 11월 30일자 베네딕토 15세의 유명한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Maximum illud)는 선교 개혁을 위한 새로운 과정의 대헌장으로 간주된다. 교서는 주로 중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비오 11세는 전임자가 제시한 노선에 따라 단호하게 나아갔다. 교황은 1922년 첼소 코스탄티니(Celso Costantini) 대주교를 최초 중국 교황 사절로 임명하여 보냈다. 교황 사절은 유럽의 보호를 받지 않겠다고 했고, 1924년 유명한 상하이 공의회를 주재했으며, 중국 주교 6인에 대한 최초 서품의 길을 마련했다. 비오 11세는 1926년 10월 28일 그리스도 왕 축일에 로마에서 그들에게 직접 서품함으로써, 중국 현지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바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코스탄티니 대주교는 또한 1926년, 1929년과 1933년(그해 로마로 복귀하여 1935년부터 1952년까지 포교성성 장관을 맡음)에 외교 관계 수립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 기간 토착화에 큰 진전을 이루었고, 이전 수백 년간 중국 천주교회 상황에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영향을 미쳤던 “중국 의례” 논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게 되었다.[3] 콘스탄티니 후임으로 마리오 자닌(Mario Zanin) 대주교가 교황 사절을 맡게 되었다. 선교와 중국 문제에 관한 비오 11세의 주요 문헌 중에, 회칙 “Rerum Ecclesiae”(1926년 2월 28일)와 중국 현지 사제들에게 보내는 교서 “Ab ipsis Pontificatus primordiis”(1926년 6월 15일)를 상기해야 한다. [3] 참조. 1939년 포교성성의 훈령 “Plane Compertum” 중화민국과의 외교관계 중국은 격동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일본의 침략, 공산당의 부상, 내부 갈등을 겪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러나 비오 12세 재위기간에도 중국 교회와 중화민국과의 외교관계에 있어 동일한 노선이 이어졌다. 1942년 ‘불평등 조약’과 프랑스 보교권이 완전히 폐지되었다. 또한 1942년 중국과 교황청 간의 외교관계 선언이 이루어졌다. 1946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최초의 추기경회의에서, 말씀의 선교 수도회 선교사 토마스 티엔껑신(Thomas Tien Ken-sin)이 최초의 중국 추기경으로 선언된다. 같은 해 중국의 교계제도 또한 수립되었다. 교계제도 구조는 오늘날에도 교황청 연감에 남아있다(대교구 20개, 교구 85개, 지목구 34개).[4] 1946년 안토니오 리베리(Antonio Riberi) 대주교는 장개석(Chiang Kai-shek) 국민당 정부의 ‘교황공사’로 난징에 파견됐다. 1949년 새 정권이 들어섰을 때, 교황공사는 이전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이주하지 않고 중국 본토에 남았으며 외국 선교사들도 남도록 요청했다. [4] 올해 9월 22일, 중국과 교황청이 주교 임명에 관한 잠정 합의를 체결했다고 발표하면서 새로운 청더 교구의 설립도 발표됨. 중화인민공화국, 천주교와의 갈등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집권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것이다. 7월 1일 검사성성은 공산주의를 규탄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유럽의 상황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 비난은 보편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새 정권의 이념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새 공화국의 첫 해에 중국의 전개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6.25 전쟁, 농지 개혁, 5개년 계획 등). 종교 문제와 관련하여 1950년 11월 30일의 ‘광위안 선언문(Guangyuan Manifesto, 廣元宣言)’은 자치(自治), 자립(自立), 자전(自傳)의 삼자(三自) 개혁 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신념은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1951년 1월, 종무국이 창설됐다. 리베리 교황공사에 반대하는 격렬한 언론 선전 이후, 1951년 9월 5일 그는 중국에서 강제 출국을 당한다. 천주교 선교사들도 1951년과 1954년 사이에 추방을 당하게 된다. 비오 12세는 교서 “Cupimus imprimis”(1952)로 삼자운동에 답했다. 실제로는 천주교와 관련한 운동은 실패하고, 조국애와 종교애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반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1954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번째 헌법이 채택되어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게 됐다. 비오 12세는 회칙 “Ad Sinarum gentem”(1954)으로 모든 형태의 ‘애국 운동’을 규탄했다. 이전 교서에 비해 보다 명백하고 구체적인 규탄이었다. 1955년 이냐시오 궁핀메이(Ignatius Gong Pinmei, 龔品梅) 상하이 주교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동시에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정치 생활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1956년-1957년에 마오쩌둥은 정부와 대중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백화’ 운동을 시작했다. 체포된 가톨릭 신자들은 석방되었고 분위기는 잠시 개선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57년에 중국 천주교 애국회가 설립되었다. 1957년 말에서 1958년 초 사이에 교황의 위임 없이 첫 번째 주교 서품이 진행되었다. 이른바 '공식 천주교회'가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1958년 10월까지 20명이 넘는 주교가 이 방식으로 서품 되었다. 회칙 “Ad Apostolorum principis”(1958년)를 통해 비오 12세는 중국 천주교 신자들의 애국심은 옹호했지만 애국회는 거부했다. 교황의 승인이 없는 서품은 불법이지만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요한 23세는 재위 초기에 중국의 상황을 가리키며 ‘분립’에 대해 언급했지만(추기경회의, 1958년 12월 15일, 1959년 1월 12일, 1959년 5월 17일) 이후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 1958년 말과 1960년 초 사이에 깊이 숙고한 후 중국 성직자들이 분립에 대한 열망이 없기 때문에 ‘분립’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59년-1960년 중국의 상황은 복잡했다. 1958년 마오쩌둥이 시작한 ‘대약진운동’은 실패했고, 마오쩌둥은 국가 원수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티베트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중국과 소련이 결별하게 되며, 러시아 기술 인력이 모두가 떠났고 반미 정치노선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60년에는 종신형을 선고 받은 주교 궁핀메이와, 1958년에 체포된 미국인이자 중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외국인 주교 제임스 에드워드 월시(James Edward Walsh)에 대한 공개 재판이 열렸다. 1962년 1월 제2차 애국회 회의는 가차없이 로마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교회를 요구했다.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주교들을 초청할 생각을 했으나 결국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공의회에 중국 본토에서 추방된 60명의 주교가 참석했으며 그중 49명은 외국인이었다. 문화대혁명과 모든 종교 활동의 금지 바오로 6세의 교황 재위 기간(1963년-1978년) 대부분은 문화대혁명의 극적인 순간과, 서방 국가와 유엔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더 이상 대만(중화민국)을 인정하지 않게 된 시기와 일치했다. 반면 바오로 6세는 대만을 계속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1970년 바오로 6세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순방하면서 홍콩에 방문함으로써 중국 본토 영역에 발을 디딘 최초이자 유일한 교황이 되었다. 1966년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이는 모든 종교 활동 금지, 모든 예배 장소 폐쇄, 종교 관례 행위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애국회 회원들도 가혹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 사망 이후 ‘4인방’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음으로써 문화대혁명이 종식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중 새로운 관계에 대한 초기 시도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재위 기간의 시작은 덩샤오핑(Deng Xiaoping)의 부상 및 개혁 시기와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1979년에 종교 부문 해빙 징후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1980년 일부 교회는 여러 도시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종무국이 재구성되었고, 5개 종교 애국회도 재구성되어 전국 대회를 개최했다. 가톨릭 애국회가 세 번째로 개최되었고, 이어 대표자 회의가 열렸으며, 이어 ‘중국주교위원회’를 창설했지만 로마에서는 결코 승인하지 않았다. 1980년대 초에 억류됐던 주교와 사제가 석방되었다. 1981년 2월 18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방문 중이던 마닐라에서 중국의 모든 천주교 신자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6월에 바티칸은 탕 이밍(Deng Yiming, 鄧以明)을 광저우 대주교로 인정하면서 내정간섭 혐의를 받았다. 바오딩의 주교는 교황청과 상의 없이 세 명의 주교를 서품했다. 1981년 12월 12일, 인류복음화성 장관 아넬로 로시(Agnelo Rossi) 추기경은 ‘정당하고 교황청에 충실한’ 중국주교단이 필요한 경우 로마와 사전 협의 없이 다른 주교들을 서품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그러나 과거 공산주의 통치하의 유럽 국가들에게 부여됐던 이 특권이 남용되어, ‘지하’ 교회와 ‘공식’ 또는 ‘애국회’ 교회 사이의 갈등이 고조됐다. 1982년 제12차 공산당 전당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5개 종교(불교, 도교, 이슬람교, 개신교, 천주교)의 통제에 관한 유명한 “19호 문건"이 유포되었다. 신헌법 제36조는 “종교 단체와 종무는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1982년에 다양한 교회 활동이 재개되었다. 추후 상하이의 주교로 서품된 예수회 알로이시오 진루셴(Aloysius Jin Luxian, 金魯賢)은 30년 동안 교육 시설이 없었던 서산에서 신학교를 다시 열 수 있었다. 1980년대 말에 약 200명의 새로운 사제가 서품 되었다. 각종 압수 자산이 반환됐고, 점차적으로 수녀원이 개방됐으며, 자선 및 교육 활동이 허가됐다. 중국 교회와 다른 나라의 주교회의, 천주교 기관 간의 접촉도 증가했다. 그러나 애국회와 애국회 회원들과의 관계에서 모호한 부분과 긴장상태가 존재했기 때문에 1988년 인류복음화성 장관인 요제프 톰코(Jozef Tomko) 추기경은 서방 주교회의에 ‘지하’와 ‘애국회’ 단체와의 관계에 대한 지시문인 “8개 요점”을 발송했으며, 이는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주제가 된다. 같은 해에 정부는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퍼뜨렸지만, 사실상 '지하 그리스도교' 근절 목표는 지속됐다. 1989년 천안문 사태와 유럽 공산주의 위기를 기점으로, 궁핀메이를 추기경으로 서품한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중국의 불신이 커지기 시작했다. 1988년 이후 궁핀메이는 미국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종교에 대한 정부의 전통적인 통제 노선은 199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새로운 환경에서 많은 '애국회' 주교들이 민간 채널을 통해 로마의 인정을 요청했고, 인정을 받게 된다. 따라서 교회 ‘분립’ 가능성에 대한 견해는 사라졌다. 2007년 1월 바티칸에서 열린 중국 위원회 회의의 최종 성명서에서 “거의 모든 주교와 사제가 로마와 친교를 이루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중요한 상황 변화였다. 중국 교회에는 앞서 언급한 상하이의 주교인 알로이시오 진루셴과 같이 정부에서 인정함과 동시에 로마와 친교를 이루는 훌륭한 목자들이 있었다. 2000년에 교황청과 중화인민공화국 관계에 새로운 어려움이 생겼는데, 이는 특히 중국에서 불법적으로 새 주교를 서임한 것과,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일인 정확히 10월 1일에 의화단 사건의 중국 순교자 120명을 로마에서 시성한 것 때문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 특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열린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관련 회의(2001년 10월 24일)에서 상당한 공명을 얻었던 메시지가 그러하다. 교황은 중국, 중국인, 그리고 중국 당국자들에게 우정과 존경의 손을 내밀어 ‘과거의 오류와 한계’를 인정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강조했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리스도교인들의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받았을 사람들에게 이해와 용서를 구합니다.” 라는 언급과 함께, “교황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구체적인 형태의 소통과 협력이 곧 확립되기를”이라는 희망을 표현했다. 2005년에 종무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발효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요한 바오로 2세 서거 당시 베이징 외교부장의 찬사와 그에 뒤이은 직접적인 접촉 재개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베네딕토 16세의 교황 재위: 교서 직접적인 접촉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긴장이 고조되었고 2006년에 ‘불법’ 서품의 새로운 사례가 발생하자, 교황청에서 이에 반응했다. 접촉의 온기가 식어버렸다.2007년 5월 27일,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중화인민공화국 가톨릭 교회의 주교와 신부로 봉헌된 이들과 평신도들에게 보내는” 사목적 내용이 풍부한 중요한 서한을 보냈다. 교황은 교회의 통합을 주장하며, 모든 특별 권한(예. 주교의 ‘지하’ 서품)을 폐지했고, 정부 당국과의 대화를 희망한다고 표명했다. 2008년 5월 7일 바티칸 바오로 6세 홀에서 베이징 중국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상하이 오페라 합창단과 함께 베네딕토 16세를 위한 특별 헌정 콘서트를 개최했다. 역사적, 예술적 전시(바티칸과 중국에서)와 과학 또는 문화 컨퍼런스에 과학자나 전문가가 참여하는 등의 다른 분야도 포함된 이른바 ‘문화 외교’의 중요한 순간이었다.그러나 몇 년 동안 로마의 동의하에 주교 서품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2010년과 2011년 사이에 일부 새로운 불법 서품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 결국 교황청은 특히 단호하게 대응했다(2011년 7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재위와 접촉 재개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위 초기부터 중국인에 대한 깊고 따뜻한 관심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교황청이 중국 당국과 실질적으로 대화를 재개할 수 있는 새롭고 좀 더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새로운 분위기를 보여주는 명백한 조짐이 있었다. 예를 들어, 교황 방한 기간(2014년 5월 14일~18일)에 교황의 항공기가 중국 영공을 비행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과 교황이 중국 국가주석에게 보낸 메시지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중국인과 중국 문화에 대한 교황의 존경심이 많이 표현된 2016년 2월 2일자 아시아 타임즈(Asia Times)에 게재된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인터뷰도 중요하겠다. 최근 몇 년 동안 접촉이 늘었으며 이제 의사소통 채널이 더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일부 중국 언론 기관과 외교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화해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 중 일부는 교황 방문 시에 발표되었고 교황의 공개 성명에 대한 논평으로 발표된 것들도 있었었다. 그 이후 교황청과 중국 관계의 역사는 현재 진행중이다. 이 글의 필자 페데리코 롬바르디(Federico Lombardi, SJ)는 이탈리아 예수회 신부이자 전 교황청 공보실장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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