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석 베드로 신부(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소장) 1983년 9월 26일, 구소련의 방공군 중령이었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가 모스크바 외곽의 군사기지에서 당직 근무를 서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미국의 미사일 공격을 알리는 조기경보시스템 컴퓨터 화면에 “Launch(발사)”라는 커다란 빨간색 글자가 나타났다. 미국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발사돼서 소련으로 향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미였다. 발사된 미사일이 처음에는 한발이었으나 숫자가 하나씩 늘기 시작했다. 결국 조기경보시스템은 미군이 발사한 미니트맨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이 5기라고 보고하고 있었다. 미국에 반격할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권한은 모스크바 지도부에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페트로프의 판단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수뇌부가 상황을 확인하고 신중한 결정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었다. 페트로프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가 보기에 이 경보는 위성의 오류로 인한 것이었다. 미국이 소련을 선제공격한다면 미사일을 고작 다섯 발만 쏘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보가 사실일 경우 곧바로 반격에 나서야 했다. 소련의 존망이, 그리고 인류의 운명이 페트로프의 손에 달려 있었다. 영화 '상을 구한 남자(The Man who Saved the World)' 스크린샷 페트로프는 신중했다. 약 5분여 동안 시끄럽게 울리는 경보 속에서 여러 정보를 종합한 끝에 시스템이 오작동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훗날 이 결정에 대해서 페트로프는 "직감에 따른 결정이었다. 확률은 50대 50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페트로프의 판단은 옳았다. 해당 경보는 위성이 구름에 반사된 햇빛을 적의 미사일로 오인한 탓에 발령된 것이었다. ‘세상을 구한 남자’ 스타니슬라프 예브그라포비치 페트로프는 1998년 유리 보틴체프 전 소련 미사일방어 사령관의 회고록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6년 유엔 세계 시민상과 2013년 드레스덴 평화상을 수상했고, 그의 행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됐지만, 페트로프는 자신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을 향해 “그것은 나의 일이었고,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삶을 묵묵히 살았던 이 남자는 2017년 5월 19일 세상과 조용히 작별했다. 최근 이어진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이 너무 쉽게 언급되는 현실은 이 땅의 ‘불안정한 평화’를 상기시킨다. 코로나19, 기후위기 등으로 인류의 생존과 안전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데도, 남과 북은 그리고 이 땅을 둘러싼 강대국들은 군비 경쟁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군사력을 통해서만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아직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는 결코 무력의 균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성 요한 23세 교황님의 가르침이 또 다시 더 절실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