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희 베드로 신부(의정부교구 7지구장) 평화는 주님께서 우리 삶에 주신 선물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선물이라도 그 포장지를 벗겨내고 그 선물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선물은 나에게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마음으로 개봉하고 그에 대해 알아볼 시간도 필요합니다. 즉 주님께서 주신 선물인 이 평화를 알고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평화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과 배움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우리 삶의 출발점이자 필수 요건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에 관해 스스로 공부하기 “사람들이 평화를 거스를 때조차 인류는 평화를 얻으려 애씁니다. 평화는 현 세계의 필연적 목표입니다. 평화는 진보할 숙명입니다. 평화는 근대 문명이 성취한 위대한 업적들이 목표로 하던 바입니다”(1970.1.1. 3차 담화). 우리가 평화에 대해 탐구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는 우리 삶의 목표가 평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적지가 평화에 있다면 우리 삶의 출발점도 평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또한 갈등과 싸움의 소용돌이에 있다 하더라도 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지금 도달한 어떤 수준이 아니라, 우리 각자 그리고 누구나 다 언제나 도달하기를 열망하는 더 높은 수준을 가리킵니다. 평화는 행동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우리 모두가 공동선에 책임을 느끼도록, 우리의 모든 노력이 인류의 참된 대의 곧 평화의 대의에 헌신토록 하는 의무를 부과합니다”(3차 담화). 교황님의 ‘평화는 행동 철학입니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우리 삶의 출발점이자 목표가 평화라면, 이 평화는 생각과 관념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이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행동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행동이 멈추어 있다면 평화도 제자리에 멈추어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평화가 ‘행동 철학’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서 평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평화를 알고, 인식하고, 의지하며, 그 평화를 사랑해야 합니다. 1982년 12월 12일 잉글랜드 '그린햄커먼' 공군기지 담장을 넘는 여성평화캠프 회원들. greenham-common.org.uk 바오로 6세 교황님은 말합니다. “서로 싸우는 사람들 가운데서 ‘평화’라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저의 사명은 사람들이 형제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저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 서로 화해시키는 것, 평화에 관해 자습하게 하는 것입니다”(3차 담화). ‘평화’라는 말은 그것 자체로 우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 말 자체가 우리를 평화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평화라는 말을 자주하고 평화로 복을 빌어 준다면 우리는 더 쉽게 화해하고, 더 쉽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평화에 관해 자습한다’라는 말은 어쩌면 일상에서 ‘평화’라는 말을 자주 되뇌이라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다 우리의 형제입니다 평화의 밭은 사랑입니다. 평화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그 씨앗을 사랑의 밭에 심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과 평화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평화에 있어) 더욱 빛나고 탁월한 그런 단어는 바로 ‘사랑’입니다. 곧 지상질서 최고의 원리인 사람을 향한 사랑 말입니다. 사랑과 평화는 서로 연결된 두 실재입니다. 평화는 사랑의 결실입니다. 평화는 참된 사랑, 인간 사랑의 결실입니다”(1971.1.1. 4차 담화).평화가 인간 사랑의 결실이라면 응당 평화는 나만이 아닌 다른 이들, 즉 형제들을 위한 사랑에 기초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평화는 반드시 형제애라는 기본 원리 위에, 즉 사람을 마땅히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기본 원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평화는 서로가 형제임을 발견하고 형제로 살기를 결심한 사람들 안에 있는 사랑을 극찬하는 그런 위대한 개념입니다”(4차 담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를 발‘사람은 누구나견하고 만날 때 평화는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을 것입니다. 다 나의 형제’라는 이 말의 의미를 우리가 진정 깨닫는다면, 평화는 우리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평화는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고, 이 평화는 우리를 이롭게 하고, 모든 이들을 이롭게 할 것입니다.바오로 6세 교황님은 ‘형제애와 평화의 방정식’이라는 말로 믿는 이들이 찾는 기쁨을 표현합니다. 형제애와 평화가 만나는 그 지점에서 우리 삶의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정의를 위해 일하십시오 평화는 정체된 삶의 개념이 아닙니다. 삶은 언제나 역동적입니다. 운동, 성장, 일, 노력, 성취같은 것들은 멈춰있지 않고 언제나 움직입니다. 평화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의 표현대로 평화는 ‘가장 능동적인 열의에 추진력을 불어넣는 중심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평화는 모든 것에 활기를 불어넣어 줍니다.평화는 외롭지 않습니다. 평화는 사랑과 더불어 ‘정의’라는 또 다른 친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평화의 참된 원천을 찾는다면, 우리는 평화가 인간에 대한 정직한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참된 존중의 결과가 아닌 그런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에 대한 이 정직한 감정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까요? 우리는 이것을 정의라 부릅니다”(1972.1.1. 5차 담화). ‘인간에 대한 정직한 감정’인 정의는 평화를 가져옵니다.“평화를 기념하자는 이 초대가 정의를 실천하자는 초대로 울려 퍼지는 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입니다. ‘정의는 평화를 가져올 것’(이사 32,17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더 예리하고 역동적인 정식,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정의를 위해 일하십시오’를 반복합니다”(5차 담화). 위에서 살펴본 평화에 대한 담론을 세 가지 주제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평화에 관해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를 지니는 것과 둘째로 형제애 안에서 평화를 함께 나누고, 셋째, 정의로써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이러한 우리의 노력은 우리 삶의 작은 기쁨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