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원 (인류학자) 2000년 여름, 나의 시야에 들어온 중·조 국경 지역인 두만강 주변에는 철조망이 없었다. 신기했다. 2006년 가을, 중국 단둥 시내에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당황했다. 강 건너가 북한 신의주인데 이를 가르는 철조망이 없었다. 아마도 단둥에서 참여 관찰을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난 시기였다. 단둥 시내에서 벗어나 신작로를 달리다가 차를 멈추었다. 1m도 안 되어 보이는 실개천 너머가 북한 황금평이었다. 그 길을 따라 막 조성된 철조망이 있었다. “아 이곳에 중·조 국경을 가르는 철조망이 있구나!”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같이 간 단둥 지인은 “여기까지가 중국 땅임을 표시하는 철조망이지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국경 철조망은 아니다.”라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는 “단둥 주변에는 이전(2006년)에 철조망이 없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여기까지가 중국 땅이라고 표시하는 철조망 조차도 없었던 세월이 약 50년이 넘었다. 그 세월에 녹아든 삶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백두산 중·조 국경은 빨랫줄(2018년) Ⓒ강주원 그러한 상상 가운데 일부는, 현실에서도 펼쳐지고 있음을 목격했고 이를 기록으로 바꾸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했다. 예를 들어 2008년 남파로 올라간 백두산 천지 주변에는 국경 표시가 있었다. 말뚝 사이를 연결한 빨랫줄이었다. 2019년 기준으로 압록강에는 철조망이 없는 지역이 더 많았다. 그곳 사람들은 철조망을 국경으로 인지하지도 않았다. 철조망이 생긴 지역에서도 그들의 삶이 크게 변하지 않고 있음을 나는 알아갔다. 약 20년 동안의 연륜이 쌓이다 보니 중·조 국경 지역의 성격과 변화는 제법 알고 있다고 자부하곤 했다. 다만 연구 대상을 떠나, 중·조 국경을 상징하는 철조망이 없다는 사실을 한 번씩 부러워했다. 숲 언저리에 철조망이 없는 휴전선이 흐른다(2020년) Ⓒ강주원 2020년 어느 날, 문득 약 40년 넘게 한국에서 살았고 한국 사람인 나는 ‘휴전선과 관련되어 얼마나 알고 있지’라는 반문을 했다. 막연하게 잘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막상 휴전선 하면 1953년 한국 전쟁 이후에 생겼다는 사실 이외에는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 별로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았다. 부러움이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순간 반성했다. 그리고는 2018년에 읽었던 「냉전·분단 경관과 평화 : 군사분계선 표지판과 철책을 중심으로」(정근식, 2018, 『황해문화 가을호 100』, 153-182쪽)를 다시 정독하였다. 그의 글이 새롭게 다가왔고 놓쳤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궁금한 부분 위주로 요약정리를 하면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노트를 다듬어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38선의 가시화는 처음(1945년 9월)에는 주요 통행로의 도로 차단기 설치와 함께 경비 초소였다. 〔…〕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21개소에 임시 말뚝을 박고 표지판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에는 러시아어·영어·한글로 “이 지역은 38도선 이남 지역이며 미국 점령 지역임“이라고 썼다. 〔…〕 (1947년 4월, 제2차 38선 합동 조사 후) 38선의 주요 교통로 83개소에 나무표지판을 설치하였고, 또한 이북 1km 이내의 마을 66개, 이남 1km 이내의 마을 63개, 총 129개 마을에 표지판을 설치하였다. 놓치고 있었다. 38선이 하룻밤 사이에 남북을 갈라놓지는 않았다. 휴전선 이전, 38선 표시는 약 2년에 걸쳐서 생긴 도로 차단기 혹은 나무표지판이었다. 물론 경비 초소도 양쪽에 있었지만, 이들 사이에는 약 2년의 세월만큼 여백이 많다. 약 1km마다 하나이다. 이런저런 책에서 읽었던 한국 전쟁 이전 사람들이 친척 방문 혹은 장사를 목적으로 남북을 오고 갔다는 사례들이 떠오른다. 그때 사람들이 그렇게도 살았다. 1948년 4월 김구 선생이 38선을 넘으면서 나무표지판을 배경 삼아 찍었던 사진을 봤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왜 나무표지판을 38선의 이미지로 연결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를 나에게 묻게 된다. 매년 숫자가 더해지는 분단 ○○년이라는 문구 앞에서 나는 어떤 분단 이후의 삶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이제는 휴전선이 궁금하다.김구 선생(가운데), 1948년 4월 38선 표지판 앞에서 Ⓒ「사진으로 본 해방 30년/한겨례 1953년 7월 27일 발표된 정전협정에서는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 간성까지 총 1,292개의 말뚝을 박고, 이 말뚝을 이은 약 248km의 가상의 선을 군사분계선(휴전선)으로 설정하였다. 군사분계선을 나타내는 표지판은 1957년까지 총 1,292개가 200m 간격으로 설치되었는데, 남측(유엔사)에서 696개를 관리하고 있고, 596개를 북측에서 관리하였다. 그래 위의 내용은 알고 있다. 휴전선은 ”말뚝을 이은 가상의 선“이다. 즉 말뚝 설치물만이 휴전선을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휴전선 전체가 철조망이나 장애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모양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이 또한 다르게 생각한 적이 있다. 휴전선이 철조망으로 되어있다고 착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때로는 휴전선의 풍경이 헷갈렸을까! 중·조 국경만 부러워했을까! 한국 전쟁 전에는 나무표지판이었고 후에는 말뚝으로 바뀌었다. 휴전선을 설정한 것이 1953년이다. 말뚝도 휴전선 전 구간에 설치하는 데 걸린 시간이 약 4년이 지난 1957년이다. 38선과 마찬가지로 그 세월의 간격이 이상하게 와 닿는다.그 말뚝을 분명 영상 혹은 사진에서 접했다. 대표적으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서쪽의 일명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에 있는 군사분계선 말뚝의 존재를 알면서도, 나는 이를 휴전선 전체의 이미지로 바로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철조망 없는 휴전선을 넘었다. 휴전선 말뚝은 2022년 현재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단지 녹슬었을 뿐 다른 무엇이 덧칠해지고 더해지지 않았다. 이러한 말뚝을 역사 속이 아닌 현재의 휴전선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강한 한국 사회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남의 탓으로만 돌렸다. 최소한 휴전선을 장벽이라고 나의 책에서는 쓰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휴전선이라는 물리적 장벽보다 분단이라는 심리적 장벽을 극복하기가 더 어려워 보였다.(강주원, 2019,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 눌민, 137쪽) 3년 전, 일 년 내내 원고를 쓰고 고치면서 휴전선을 장벽 혹은 철조망으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휴전선을 물리적 장벽이라고 위의 문구를 남겼다. 내 탓도 있었다. 장벽의 사전적 의미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핑계를 대기에는 휴전선 말뚝이 휴전선은 장벽이 아니라고 무언의 시위를 한다. 이미 활자화된 나의 글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가 막막하다.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