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희(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20기 상임위원) 영화 『모가디슈』 포스터 모가디슈와 어린이 지난해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주목을 받은 작품 중 하나는 내전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남과 북의 외교관이 협력해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한 실화를 그린 『모가디슈』이다. 영화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날이 서게 남북 외교 관료가 체제경쟁을 해도 위기 시에는 힘을 합쳐 극복해 나간다는 민족주의 코드를 강조한다. 서로 비방해도 막상 마주 앉으면 젓가락을 이용해 같은 반찬을 짚기도 하고 정말 쉽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너무 익숙한 민족주의 코드 말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며 다시 평화와 통일에 대한 감수성에 젖을 것이며, 동족이라는 정체성을 곱씹기도 할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끈 부분은 모가디슈의 어린아이들이 살육 무기인 기관단총을 장난감처럼 든 채 깔깔 웃으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허공에 난사하고 어떤 어른도 이들을 제재하지 않는 장면이었다. 폭압적인 독재 정권으로부터 해방해야 한다는 당위가 내전의 정당성이 되었기에 이를 따르는 이가 이 당위를 관철시키는 행위를 한다면 어떤 폭력도 타당하며 권장되는 환경, 해방을 명목으로 반군 진영으로부터 얻어낸 폭력의 정당성을 향유하는 이들의 장면은 현실 사회에서 폭력이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가 될 때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소년병은 사고와 신체가 성숙하지 않은 이들까지도 병기로 활용하는 전쟁의 잔학성을 상징한다. 소년병과 전쟁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十여 명은 될 것입니다. (…)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 영화 『포화 속으로』 스크린샷 6·25 전쟁에 참여한 소년병 이우근 군이 전사하면서 남긴 편지 내용 중 일부다. 71명의 소년병이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다 모두 전사한 포항 전투는 영화 『포화 속으로』로 각색되어 개봉된 바 있다.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학생들이 손을 벌벌 떨며 총을 쏘고, 인민군에 끝까지 저항한 장면이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수류탄을 던져 인민군을 죽였다는 고백, 적이지만 언어와 피를 나눈 동족을 사살한 것에 괴로운 마음, 자신 앞에 기다리고 있는 죽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꼭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절절히 담긴 이 군의 편지 내용. 영화는 소년에게 총을 들게 한 극단의 시대에 대한 참회보다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반공과 조국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소비하고 만다. 문제는 어떠한 종류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어떤 인류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공간이 협소해진다는 것이다. 모가디슈에서 총을 잡은 어린이들이 권력층에게 억압받는 피지배층으로서 사회혁명과 전복의 주체인 ‘민중’이라면, 법에 의해 규정된 주권의 주체인 ‘시민’과 동등하게 평가되기도 하지만, 국가에 종속되어 동원되기도 하는 ‘국민’은 어린 나이지만 조국을 위해 『포화 속으로』 던져지기도 한다. 국가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민족’이라는 개념은 같은 핏줄과 언어를 지녔다는 동질성을 강조하지만 이 역시 상상에 의거해 만들어진 공동의 정체성으로 피아를 구별짓는 데 활용된다. 필리핀 반군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 소년병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장엄한 표현 아래 구한말 식민 지배를 한 일본의 잔학성을 강조하고 대의를 위한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독립운동가의 폭탄 및 암살 투혼이 거리낌없이 저학년 어린이에게 교육된다. 이 글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소년병들의 죽음이, 저 멀리 모가디슈의 어린이들의 저항이 헛되거나 의미없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참담한 상황의 배경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고민과 참회가 부재하다면 민중과 국민, 민족으로서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던 일종의 어떠한 정당성만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렇게 강조된 정당성은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비슷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내재한다. 중요한 것은 민중, 국가, 민족 등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따라 설정될 수 있는 정체성의 범위는 겹치기도 하지만 충돌하기도 한다는 점이겠다. 국민과 민족, 민중의 경계 북한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국민과 민족, 민중 이 세 개념의 중첩과 충돌은 참 난감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포화 속으로』 들어가 희생한 71명의 소년병들이 북한으로부터 지켜낸 신성한 조국으로만 기억한다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 중 분단 후 남한이 아닌 북한을 선택한 이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게 된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도모하려고 해도 각자의 조국을 위해 6·25 전쟁에서 희생한 상대방의 순국선열을 어찌 평가해야 하는지 애매해진다. 민족과 민중의 정체성에 머무는 이들 중 일부 극단주의자는 한국 정부와 헌정 질서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급진론에 경도되어 한반도 유사시 국가 기간 시설 파괴나 폭탄 제조, 통신 교란 등의 선동으로 사회 문제화되기도 했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민족 간 군사적 갈등이 존재하며, 부조리한 체제에 저항하다 내전으로 번져 이제는 누가 더 잘못인지 알 수 없는 분쟁 지역이 수두룩하다. 과거가 어떻든 현재를 사는 우리는 비폭력과 평화라는 방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면 개인이 국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여러 정체성 중 어떤 역할을 취하는 것이 평화와 비폭력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은 명확하다. 특정한 정체성에 스스로 매몰될 것인지, 상황과 환경에 맞춰 비폭력과 평화라는 방법에 의거해 유연하게 정체성을 선택해 나갈 것인지 말이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이라는 인류는 어떤 얼굴을 갖고 있습니까? 나눔 주제 -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골라 의견을 나눠 보세요. 여러분이 정하실 수도 있습니다.1. 같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남북관계에 영향을 매우 크게 미치는 개념입니다. 한편, 한국 사회에서는 다문화 가정과 이주노동자가 점증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래 통일 한국이 형성되는 과정에 사회를 조화롭게 통합시킬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일지 토론해 봅시다. 2. 평화의 전제 조건 중 하나로 '중산층이 중심이 된 시민의 성장'을 꼽습니다. 시민은 사적 혹은 계층적 이익보다 공익적 가치를 추구하며, 국가의 경계를 넘어 세계 현안에도 목소리를 높이기도 합니다. '중산층이 중심이 된 시민의 성장'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토론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