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원 (인류학자) 2006년 전후 두만강과 압록강에 울타리 성격의 철조망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그 역사를 기록해 왔다. 그런데 한국의 DMZ를 연구 주제로 삼기 전인 2020년 이전에 나는 한국 사회에 분단과 관련된 철조망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니 그 철조망은 한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생겼다고 여겼다. 이런 나의 짧은 생각을 위로하는 내용이 다시 읽고 있는 정근식의 글에 있다. “(2018년 현재) 분단을 상징하는 철책은 흔히 휴전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따라 설치된 것으로 오해되지만, 철책은 설치된 시점과 이들이 시민들에게 알려지는 시점이 다른 모호한 존재”라고 서술하고 있다. 무지 혹은 무관심이 나만이 아니었다고 위안을 삼기에는 좀 그랬다. 하여튼 그는 철조망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휴전선, 정확하게 비무장지대(DMZ)의 남방한계선에는 1965년까지도 뚜렷한 장애물이 없었다. 〔…〕 (신인호는) 철책 이전에 목책이 1964년에 설치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 (이재전의 증언에 따르면) 1967년 초에는 서부전선에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고, 다른 지역에는 그것조차 없었다. 〔…〕 김신조 부대가(1968년 1월) 침투한 파주 지역에 이미 철책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의 철책은 미군의 원조로 1968년부터 제21사단에서 설치하기 시작하여 이후 전면적으로 확대되었고 1972년까지 완료되었다. 이후 이 철책들은 다시 세워지거나 덧씌워졌다. 〔…〕 실제로 철책은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군사분계선에서 2km 떨어진 지점이 아니라 약 0.5km 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에 설치되어 있고, 이것이 실적인 남방한계선이라고 할 수 있다.(정근식, 2918, 「냉전·분단 경관과 평화 : 군사분계선 표지판과 철책을 중심으로」, 『황해문화 가을호 100』, 153-182쪽) 철책으로 세워진 남방한계선 (2008년) ⓒ박민수/오마이뉴스 위의 글은 휴전선과 남방한계선을 구분하고 있다. DMZ 끝자락인 남방한계선에도 1965년까지는 장애물이 없었다. 그 이후 휴전선이 아닌 남방한계선에 목책이 등장한다. 약 3년 후인 1968년 전후부터 철조망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1972년까지 약 5년에 걸쳐서 남방한계선 철조망이 생겼다. 이 대목을 정리하면서 나는 약 50년 동안 철조망이 없었던 중·조 국경 지역의 주변이 떠올랐다. 그때서야 계산해보았다. 1945년 광복 이후 38선은 나무표지판이었다. 1953년 한국 전쟁 이후 휴전선에는 말뚝만이 존재하였다. 즉, 분단 이후 남북을 가르는 것은 나무표지판과 말뚝이다. 철조망이 휴전선이 아닌 DMZ의 끝자락 안과 밖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68년 전후다. 1945년 광복 이후를 기준으로 한다면 약 23년 동안 철조망이 없었다. 1953년 한국 전쟁 이후를 기준으로 한다면 휴전선과 DMZ에는 약 15년 동안 철조망이 없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 한국 사회에 분단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철조망이지만, 그 철조망은 분단과 동시에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철조망의 역사는 분단 세월에서 약 23년을 빼야 한다.나는 한국 사회가 분단과 관련되어 말해 온 철조망이 생긴 역사에 대해서 까막눈이었다. 하지만 휴전선에는 철조망이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분단 역사에서 남방한계선 철조망의 역사는 약 23년 동안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휴전선에 철조망이 있다고 착각하거나 철조망과 분단의 역사가 같다고 잘못 알고 있는 글들이 눈에 자주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는 아래의 글과 같이 한국 전쟁이 휴전되면서 철조망이 세워졌다고 잘못 표현한 내용이 자꾸 보인다. 나도 몰랐다. 하지만 철조망이 없는 휴전선의 모습과 철조망이 없었던 남방한계선의 역사를 모르는 경우가 한국 사회의 단면을 차지하고 있다. 너무나 익숙한 대상에 대한 오류를 떠나, 남북 분단과 관련된 기본 사실을 한국 사회는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예를 들어 습관적으로 분단의 장벽(철조망)을 말할 때 휴전선이라고 쓴 표현을 남방한계선으로 바꾸어 읽어보았다. 무엇인가 어색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의 이런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휴전선은 남북을 가르는 분단의 상징으로 나는 배웠다. 과연 남방한계선을 남북을 가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말장난일 수 있겠다. 휴전선은 실질적인 국경은 아니라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남북을 가르는 경계(境界)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도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거기에는 가상의 선이 있을 뿐 철조망은 없다. 남방한계선은 휴전선이 있는 DMZ의 끝자락에 있다. 남방한계선 철조망이 생긴 배경을 들여다보면 양쪽을 나누는 경계보다는 북한을 상정한 경계(警戒) 또는 경비가 목적이었다. 남방한계선 너머에 휴전선이 있다. 휴전선과 북쪽 DMZ 너머에 북한이 있다. 휴전선 이남의 DMZ는 유엔사가 관리한다. 남방한계선 이남부터는 한국 지역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한국 사회는 1968년 이전에 남방한계선 철조망 없이 살아왔다. 그 이후 DMZ와 한국 땅 사이에 그러니까 남방한계선 철조망을 만들어왔다. 어떻게 보면 한국 땅의 시작과 끝자락에 철조망을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그 철조망은 분단의 상징일까? 1968년 이후 남방한계선 이외에도 한국 사회는 DMZ가 아닌 지역에 다양한 명칭의 철조망을 만들어왔다. 한강 하구 철책 철거 기념식(2021) 한강 하구의 철책은 1970년에 설치되었다. 한강 하류 고양과 건너편 김포 양쪽 강변에 22.6km의 철책이 세워졌다. 〔…〕 동해안에도 목책에 이어 철책이 설치되었다. 〔…〕 강화 교동도의 경우 1998년에 해안 철책이 설치(정근식, 2918, 「냉전·분단 경관과 평화 : 군사분계선 표지판과 철책을 중심으로」, 『황해문화 가을호 100』, 169쪽) 다시 말하면, 철조망은 해방 이후의 분단 과정 혹은 한국 전쟁 직후의 결과물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물이다. 1968년 전후부터 철조망은 남북을 가르는 지역이 아닌 지역에 만들어졌다. 한국 땅 끝자락과 DMZ 지역이 아닌 여기저기에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철조망을 분단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것은 한 번 정도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1953년 한국 전쟁 이후, 약 15년 동안 철조망 없이 한국 사회는 살아왔다. 분단과 철조망을 동일시하면 그 세월을 외면하는 모양새다. DMZ와 남방한계선 철조망은 탄생 배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현실에서 이 둘을 결부시키곤 한다. 파주와 임진강을 다니면서, 나는 DMZ 글자 주변으로 철조망을 함께 그린 그림을 자주 보게 된다. 2014년 정부가 구축한 《디엠지기 홈페이지》에서 그 사례를 볼 수 있다. 남방한계선의 시작과 끝이 DMZ이기 때문에 틀린 그림은 아니다. 《디엠지기 홈페이지》 메인 ⓒwww.dmz.go.kr 볼 때마다 나는 이 이미지를 보면서 사람들이 휴전선에 철조망이 있다고 잘못 생각할지 아니면 남방한계선 철조망이라고 생각할지 궁금했다. 전자의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나의 기우는 뜻하지 않은 공간에서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것도 DMZ 안이었다. 판문점 왼편에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있다. 철조망이 없는 휴전선이 약 400m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현장이다. 2020년 이런 마을회관 옥상에는 KT 전망대가 있다. 그곳의 안내 모니터의 영상들에는 휴전선 위치에 없는 철조망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현장과 영상이 다르다. 아니 영상이 틀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DMZ는 저 멀리 있는데 민통선 이북이고 한강 하구이고 동해안이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철조망이 있는 지역에 DMZ를 가져다 붙일 때도 있다. 각각의 명칭이 있던 철조망을 DMZ 철조망으로 통일해서 부르기도 한다. 내 생각에 분단의 상징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DMZ와 남방한계선 철조망이 아닌 DMZ와 휴전선 말뚝을 조합한 이미지가 맞을 것 같다. 한국 전쟁 이후, 분단의 역사를 함께 한 이미지라면 이게 맞다. 철조망이 아니다. 말뚝이 남북을 가르는 분단의 상징이다. 이는 내가 생각해도 또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의 어떤 고정관념부터 바로 잡아야 할까? 휴전선에는 철조망이 없다. 남방한계선 철조망의 역사는 분단 세월에서 약 23년 동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