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선 벨라뎃따(평화사도 1기 & 동화작가, 평화운동가)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 스크린샷 (이장호 감독, 1992) ‘명자 아끼꼬 쏘냐’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1992년 당시 18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었다. 고가의 파나비전 카메라를 외국에서 대여해 사할린, 일본, 러시아(당시 소련), 홍콩 4개국에서 촬영하는 등 여러 가지로 화제가 되었다.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 영화의 배경은 일제 강점기이다. ‘명자’라는 조선인 여성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면서 일본과 러시아 사할린에서 살게 되는 아픔을 그렸다. 나는 ‘명자’가 살았던 사할린에서 90일을 머물렀다. 운 좋게도 사할린 한인 1.5세대인 박승의 선생님 댁에서 편히 지내게 되었다. 경상도가 고향인 선생님은 1942년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강제 징집(더러는 관 알선)된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까지 사할린에 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역시 명자처럼 ‘승의, 다카하라, 유라’ 3개의 이름으로 살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80여 년을 살면서 6번이나 국적을 바꾸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일제 강점기 1942년 사할린 땅에서 태어나 해방까지 3년은 일본 국민으로, 1945년 해방 후에는 무국적자로, 1958년에는 북한 공민으로, 1970년대에는 소련 국적자로, 1990년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연방 국민으로, 2010년 영주 귀국하여 마침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삶을 이어간다. 사할린 강제 징용 가족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일본 아이들과 놀면서 일본 말과 일제 사상을 무의식적으로 섭취했고, 1948년 조선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소련 공산주의 사상을 획득했으며, 2009년부터 대한민국 자본주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나는 누구냐?’란 질문에 대답할 때 머리가 터질 지경으로 혼란스럽다.’ 박승의,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 - 사할린 강제징용 가족의 수난과 극복 (구름바다, 2019) 박승의 선생님은 당신의 책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다. 지금은 영주 귀국해 경기도 파주 문산에서 노년을 보내고 계시지만, 사할린에 두고 온 자식과 친지들이 늘 그립기만 하다. 정부의 영주 귀국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고, 일제는 패전국이 되었다. 북위 50도 이남, 남 사할린을 차지하고 있던 일제도 소련에 밀려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으로 살았지만, 일제에 의해 사할린에 버려지고 말았다. 일제는 자국민 그리고 자국민과 결혼한 조선인들만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배를 보내준다는 말만 믿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지만 배는 오지 않았다. 사할린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 사할린한인 위령탑 Ⓒ 오마이뉴스 사할린의 항구 도시인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는 조각배 모양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배는 붙어있지 않고 갈라져 있다. ‘명자 아끼꼬 쏘냐’의 촬영 장소이기도 한 이곳에서 사할린에 남겨진 조선인들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해방을 맞았지만, 미군정 아래 놓여 있던 남한은 어수선했다. 질서를 최우선했던 미국은 만주와 일본에서 돌아온 전재민만으로도 복잡한데 사할린 한인들까지 돌아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미군정 눈치만 살피던 정치인들은 사할린 문제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소련 역시 미국과 손잡고 있는 남한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도록 한국과 소련은 단절 상태가 계속되었다. 1990년 김영삼 문민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한-러 수교를 맺게 되고, 사할린 한인들 이야기가 자연스레 등장하게 되었다. 사할린 한인 문제는 정부의 노력보다는 사할린 강제 징집된 한인들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비행기로 3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고향을 50년이라는 기다림 끝에 돌아올 수 있었다. 영주 귀국은 사할린 1세대와 1.5세대(1세대의 자녀로서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자)에게만 자격이 주어졌다. 여기에는 2인 1세대라는 조건도 따라붙었다. 박승의 선생님과 이소자 어르신은 부부라 상관없었지만, 배우자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분들은 한집에서 같이 살 짝을 구하는 게 몹시 곤혹스러웠다. 어찌어찌하여 짝을 이뤄 영주 귀국을 하게 되었지만, 자식과 친지들과는 또 다른 이별을 해야 했다. 귀국한 어르신들은 서울, 안산, 인천, 고령, 제천, 문산, 김포, 부산 등에 둥지를 틀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강제 징집으로 고향의 가족과 이별을 해야 했고, 사할린에서는 전쟁이 깊어지자 일본 본토로 재징집(이중 징집)되면서 사할린에 있는 가족과 이별을 해야 했다. 지금은 영주 귀국으로 사할린에 있는 가족들과 이별을 하고 있다. 그래서 더러는 가족들이 보고 싶어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가는 분들도 생겨났다. 며칠 전 박승의 선생님과 이소자 어르신을 만났다. 매년 여름이면 사할린에 가서 3개월을 지내다 오는데, 코로나로 2년 만에 갔다가 한 달 만에 부랴부랴 돌아왔다고 한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국경을 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일까.역사를 알게 되면 사람들이 보인다. 제각각의 색깔과 향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은 그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는 건 어떨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