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욱 엘리야 신부(의정부교구 전곡성당 주임신부)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을 소재로 한 기획전시 포스터 『천변풍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천변풍경』은, 박태원(호 ‘구보’)이 쓴 소설입니다. 박태원은 1930년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李箱) 등과 함께 ‘구인회’에 가담한 근대주의(모더니즘) 작가입니다. 박태원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서울에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전쟁 중에 북으로 간 월북작가입니다. 월북 후, 북쪽의 대학에서 문학 교수를 하다가,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을 당했다가, 다시 복귀해서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대하 역사소설을 쓰고 1980년대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즘 이 작가가 다시 회자 되는 것은, 이 작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소설이 수능시험 지문으로 출제됐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영화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이기 때문이라고들 하기도 하고요. ▲(좌)소설가 박태원, (우)박태원의 결혼식(1934년 10월 27일)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뭐 여하튼, 이 작가의 『천변풍경』은 1930년대 서울 청계천변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결코 화려하지도 투철하지도 않은 구차한 삶을 어떤 이념이나 계몽의 목적 없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이야기도 아니고, 일본인에게 억압당한 울분과 슬픔을 표현한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50편(절)으로 되어있는 이 소설은, 그 시대의 ‘일일 시트콤’ 같은 구성입니다. 그렇게 그저 소소하고 구차하게, 그러나 너무 사실적이어서 가슴 아린, 그러나 또 ‘그땐 그랬구나’라고 미소 짓게도 하는 그런 소설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직접적이진 않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 불행을 절절히 느끼게 합니다. “불행에 익숙한 사람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이 말은 『천변풍경』의 등장인물 중 금순이를 설명할 때 쓴 말입니다. 금순이는 나이 열다섯에 시집가는 날 신랑이 도망치고, 다음 해에 열세 살 신랑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기가 차고, 말리는 시아버지는 더 이상(?)하고, 열세 살 신랑은 자기를 무서워하고…. 그렇게 2년 살았는데, 친정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친청아버지와 동생은 먹고살기 위해 가산을 정리해서 어딘지 모르게 떠나가고, 그 꼬마 신랑은 호열자(콜레라)에 걸려서 세상을 뜨고…. 그래서 신세 한탄하며 읍내로 나가 헤매다가 강물에 몸을 던지려 했는데 그때, 이상한 남자(?)가 나타나서 서울로 가면 돈 잘버는 공장에 취직할 수 있다고 꼬셔서 서울 천변의 여인숙에 오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게 쉽게 따라갈 수 있지?’ 그것을 설명하는 말이 바로 “불행에 익숙한 사람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입니다. 물론, 이후에는 더 불행해지지 않고 천변의 좋은 친구들을 만나 아버지와 동생도 다시 만나고, 화려하진 않지만 나름 행복(?)하게 되지만, 금순이의 상황을 표현한 이 말은 금순이만이 아니라, 그 시대, 또 모든 시대, 특히 분단된 우리나라를 잘 표현한 말인 듯합니다. ▲ 금순이는 인신매매꾼 겸 금전꾼의 말에 속아 서울로 왔는데, 인신매매 직전 평화카페 여급인 기미꼬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사진은 소설 속 평화카페를 재현해 놓은 전시이다. 우리 민족은 참 불행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유혹에 잘 빠지는가 봅니다. 수많은 불행을 겪고 그렇게 불행에 익숙한 우리 민족은, 자본과 이념의 유혹에 빠져 분단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불행해졌는데, 또 다른 유혹들이 다가와 우리를 더 많이 갈라지고 분단되게 합니다. 원래 유혹은 욕심을 품은 사람이 빠지는 것인데, 불행이 익숙한 사람도 자포자기와 체념으로 빠져들기 쉽습니다. 이 유혹을 이겨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가족과 함께했던 추억을 되새겼던 금순이처럼,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지금은 잃어버려서 아련하기만 한 남과 북이 함께였던 추억을 되새기고 희망해야 하지 않을까요?▲ 청계천의 과거와 현재 [출처: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월북작가들을 알고 그들의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남과 북이 함께였던 추억을 되새기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기회를 주시는 은총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우리가 점점 더 많이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화려하고 풍요롭지는 않지만 모두 함께였던 소박한 추억으로, 우리를 갈라놓고 포기하고 체념하게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서, 평화롭게 행복하게 되는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