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희(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20기 상임위원) 전쟁, 그리고 참혹한 현실 더는 전쟁은 없으리라 생각했던 시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하고 무엇을 위한 다툼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혹자는 옛 소비에트 연합의 부활을 꿈꾸던 푸틴의 무리한 야망을 전쟁 발발의 원인으로 지목했고, 다른 이는 코미디언 출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외교적 무능을 꼽았다. 누군가는 한때 핵보유국이었던 우크라이나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방 세계를 너무 안일하게 의지해 핵을 포기한 대가를 이제야 치른다고 논하며, 어떤 이는 유럽 자유주의 블록과 옛 소련 블록 사이에 낀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치를 전쟁의 원흉으로 설명하였다. 사실 어떤 분석이라고 할 것도 없이 각 의견은 나름의 학술적 이론에 우크라이나 상황을 대입해 나온 것이므로 이에 대한 가치 판단과는 상관없이 일정 부분은 설명력을 갖추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정치와는 다르게 중재하거나 처벌할 수 있는 권위체가 부재한 국제정치에서 각 국가는 생존을 위해 힘을 증강해야 하며, 힘의 균형 혹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닌 타국과의 공조를 통해 안보를 수호해야 한다. 혹자는 피해자에게 전쟁 원인의 화살을 돌린다고도 비판하겠지만, 우크라이나가 노출한 힘과 외교의 공백을 러시아는 파고들었다. 전쟁의 책임에 대한 일차적인 추궁은 침공을 한 당사자에게 하는 것이 맞지만,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지역의 국가가 섬세하고 치밀하게 외교와 국방 정책을 다루지 못한 부분도 논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계 군사력 순위 © 글로벌파이어파워/연합뉴스 이렇게 전쟁이 발생하고 비폭력과 평화론적 가치가 국제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때면 허무해진다.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많은 이들의 헌신이 무의미한 것인가 생각하게 되며, 왜 러시아는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불어 지정학적 위치를 지닌 지역이 언제든 전쟁에 노출될 위험을 내재한 곳이라면, 우크라이나 만큼이나 중국과 러시아 등 옛 사회주의 블록인 대륙세력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유주의 블록인 해양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서방 세계의 약속만 믿고 핵을 포기했다가 러시아에게 공격을 받게 된 우크라이나의 현 모습이 북한의 비핵화를 더 어렵게 할 참고 사례가 될 것이라는 예상도 하게 된다. 수많은 세계 평화 운동과 인류의 평화를 고양하기 위해 탄생시킨 국가 간 협의체 UN이 현 시점에서 아무런 쓸모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현재 상황도 회의감을 들게 한다. 실제 전쟁을 예방하는 것이 국방력, 힘의 논리 외엔 딱히 없는 것일까. 평화를 논하는 것이 말의 성찬에 불과한 것일까. 제도와 규범으로는 평화를 형성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일까. 답부터 이야기 한다면, 국방력이 충분히 담보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평화에 대한 다양한 상상과 실천, 담론이 풍성해질수록 사회가 더 나은 방향과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전쟁이 없는 상태라 한정하던 평화의 정의가 안보적 위협은 물론 경제 사회적으로도 개인이 안정적인 상태라고 확장되면서, 사회복지를 비롯한 일반적인 행복추구권까지 평화의 범주에 포함되었고 이에 조응해 국가의 관련 정책이 수립되는 데 규범적 근간이 될 수 있었다. 덜 폭력적인 국가를 위해 한국의 안보와 관련해 국방력은 생각 외로 견고하다. 역대 한국 정부 공히 남과 북의 평화통일을 논하지만 어떤 정부랄 것도 없이 모두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증강해 왔고, 그 결과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혹자는 이런 정부의 접근이 북한에 기만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평가하며, 북한과의 평화를 논하면서 한미군사훈련을 지속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하기도 한다. 북한 역시 평화를 논하는 남한이 군비를 증강하는 정책을 거두지 않는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정부의 군비 지출이 복지 사업으로 전용되면 사회구성원의 후생이 더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같은 접근을 납득하는 까닭은 지극히 현실적인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평화를 논하며, 사회가 평화와 반전, 끝도 없는 이상주의를 이야기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국가의 전략적 선택지를 넓혀주거나 다양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과 전략적으로 밀접한 타국이 참전에 종용하거나 비상식적인 파병을 요청하는 등 한국 외교에 민감하게 영향을 미치는 특정 외교노선을 강요할 때, 국내에서 이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커질 경우 국가는 사회의 비판을 협상에 활용한다. 내부의 저항을 핑계로 타국과의 협상에서 더 좋은 조건을 갖추도록 설득하는데 양면 게임(two-level game), 즉 국가가 타국과 협상을 벌여야 할 때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양면적으로 협상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국가는 국가 이익과 생존에 맞춰 행동하며, 절대 이 원칙을 놓지 않는다. 국가가 국가의 역할을 하듯이, 사회는 사회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가 조화롭게 운영될 때 더 나은 대안이 나타날 공간이 열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의 이상과 평화 담론이 국가적인 과제로 관철되지 않는다고 하여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조소하기보다 이 양면성을 지닌 게임의 법칙을 평화에 가깝게 조정하며, 제도와 규범과 같은 비물질적 가치가 통용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도록 운용할 지혜일 것이다. 우리가 전쟁 반대를 외치고, 구체적으로 군사비용 지출 삭감을 요구할수록 국가는 투명하게 지출 비용을 공개하며 국방의 목표를 대외 팽창보다 외부로부터의 국가 방어의 개념으로 수렴한다. 이상과 규범에만 경도되어 현실을 외면하거나 과소평가하기에 국제정치는 투쟁 상태가 끊이지 않는 공간이다. 이상과 규범을 주장하더라도 이 주장이 지닌 전략적 무게와 국가 정책과 조응할 수 있는 접점에 관심을 기울이고 인지해야 할 까닭이다. 국가 내 사회 통합이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때로는 국가와 사회의 갈등적인 상황이 역설적으로 국가의 정책과 개인의 삶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외교 안보와 관련해 국가와 사회의 갈등이 긍정적으로 발현된 양면 게임 사례에 대해 토의해 봅시다. 국가는 전쟁의 주체이면서도 국민 보호 책임을 지고 있는 양면적 속성을 지닙니다. 국가의 이중성이 국제 관계의 평화에 긍정적으로 미칠 수 있으려면 개인과 사회는 국내외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논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