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선 벨라뎃따(평화사도 1기 & 동화작가, 평화운동가) 며칠 전, 버스를 타고 먼 길을 다녀왔더니 머리가 아프고 속도 울렁거렸다. 차멀미 때문이다. 파와 고추가 들어간 얼큰한 라면이 먹고 싶었다. “웬일로 라면이에요?”. 내 사정을 들은 아들이 자기가 끓여주겠다며 냄비에 물을 얹었다. 덕분에 편히 앉아 라면을 먹었다. “어때요?” “진짜 맛있다.” 정말 기똥차게 맛있었다. 머리 아픈 것도 싹, 울렁이던 속도 편안해졌다. “제가 좀 끓이죠. 그동안 제가 먹은 라면이 얼만 대요.” 아들 대답에 매섭게 눈을 흘겼다. 라면을 향한 특급사랑을 멈추지 않겠다는 뜻이니. 오늘처럼 라면을 먹을 때면 생각나는 그림책이 있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이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하세가와 요시후미 저/장지현 역 (고래이야기, 2009)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잘 사는 나라 어린이들은 라면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바이올린을 켜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른다. 그러나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지구 반대편에 사는 어린이는 아기를 봐야 하고 물을 길어야 하며, 소를 몰아야 하고, 빵을 팔아야 한다. 그러다 쓰러져 죽기도 한다. 몇 년 전 의정부교구 주보에 실렸던 ‘한눈에 보는 세계 빈곤 현황’을 읽고 깜짝 놀랐다. 하루 수입 2.5달러 미만 절대 빈곤층이 약 35억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만성적 기아로 전 세계의 8분의 1인 7억 9,500만 명이 굶주렸지만, 생산되는 식량의 3분의 1이 버려졌다. 매일 3만 명의 어린이가, 곧 1분에 18명의 어린이가 극심한 빈곤으로 사망했다. ▲2016년 1월 17일 의정부교구 주보 (자료참조: 유엔세계식량계획(WFP), 유니세프(UNICEF), 세계식량농업기구(FAO) 그깟 라면 하나 끓여 먹으면서 이렇게까지 생각해야 하냐고 말할 수 있다. 나 역시 텔레비전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이를 돕자는 영상이 나오면 불편한 마음에 얼른 채널을 돌리니까. 코로나19로 1년을 보내는 사이 세상은 ‘코로나 디바이드(코로나19 사태로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상으로, 코로나19로 인한 경제·고용충격이 저소득층 등의 취약계층에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반영하는 말)’ 현상이 뚜렷해졌다. 세상은 렙톤 두 닢을 봉헌할 여인을 필요로 하지만, 그 여인이 내가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나도 렙톤 한 닢을 선뜻 내놓지 못하지만, 라면을 먹을 때마다 아기를 봐야 하고 물을 길어야 하며, 소를 몰아야 하고, 빵을 팔아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려 한다. 종종 먼 길을 떠나야 할 때가 있다. 낯선 길은 두려움과 설렘이 함께 한다. 길눈이 어두운데다 방향감각마저 없는 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목적지에 도착한다. 며칠 전에는 머리를 굴려 길을 잘 가르쳐 줄만한 사람에게 조촘조촘 다가가 길을 물었다. “저, 죄송...”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뭐야?’ 하는 경계의 눈빛을 날리며 휙 지나가 버렸다. 다른 이는 손사래를 치며 다가오지 말라고 인상을 찌푸렸다. 황망한 마음에 종종걸음을 치다 이내 다시 길을 물었다. “혹시, 000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할까요?” “어, 저도 그쪽으로 가요, 같이 가세요.” 하마터면 아이를 와락 안을 뻔했다. 중학생인 아이는 바쁜 등굣길에도 내 걸음과 보조를 맞춰서 걸었다. 이 아이를 통해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저 고맙다는 말로 마음을 전했다. 학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