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 2020년 1월 23일 사목적 관점 상하이 천주교 교회 설립 400주년 기념 행사는 불과 10여 년 전인 2008년에 거행되었다. 그날은 한림원(Hanlin Academy) 회원인 서광계(Xu Guangqi)의 세례일이기도 했다. 그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갔던 예수회 회원 중 한 사람인 라자로 카타네오(Lazzaro Cattaneo) 신부에 의해 교회에 입교했다. 91년 생애 동안[1], 400년 역사의 거의 4분의 1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목격한 진루셴 주교는 이 행사에서 상하이 천주교의 과거를 기리고, 미래의 길을 제시했다.[2] 진 주교는 예수회를 비롯한 외국 선교사들의 놀라운 공헌을 인정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세기 중반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중국에서는 400년 전 평신도 시대였습니다. 더욱이 천주교는 중국 평신도와 지도자들,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 선교사들이 추방된 후에도 계속 교회를 살려냈기 때문에 산발적인 박해 속에도 살아남았고, 따라서 중국 천주교의 미래는 평신도들의 복음화 임무 수행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 진 주교는 앞으로의 임무가 갖추어야 할 주요 특징을 설명했다. 첫째, 그는 이 역사적 순간의 윤곽과 의미를 “하느님의 지극히 지혜로운 섭리 안에서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던 외국 선교사들의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하느님은 이 거룩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이 지시를 받아들이고 복음화를 더 나은 방식으로 수행해야 합니다.”라고 제시했다. 사명은 네 가지 요점으로 정의된다. “1) 복음화는 모든 천주교 신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천주교 신자인 우리 모두는 복음을 위해 사제 및 수녀와 협력하며, 복음 전파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3) 복음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희생정신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4) 희생정신과 함께 봉사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진 주교의 이러한 메시지는 매우 도전적이며 예언적이다. 돌이켜보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제들에게 자주 하신 비슷한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진 주교와 교황은 그들을 일깨우고[3] 안일함을 떨쳐내게 하고, 편안한 출세 제일주의와 그다지 미묘하지 않은 형태의 방종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것을 떨쳐버리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국에서 진 주교는 문화대혁명 이후 교회가 정상화 되고서야 성년에 이른 젊은 사제들에게 도전을 요구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첫 번째 요점 – (1) “복음화는 모든 천주교 신자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진 주교는 권위자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첫 번째 회칙 “Deus Caritas Est”(2005)의 가르침을 인용하며, 교회의 세 가지 주요 임무를 나열하는데, "첫째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요, 둘째는 부지런히 성사를 집전하고 성사에 참여하는 것이며, 셋째는 자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진 주교는 "상하이 천주교 신자 대부분은 첫 번째와 세 번째 임무는 등한시하고 두 번째 임무에만 주의를 기울입니다.” 라고 지적한다. 성사의 가치, 성사를 집전하는 성직자는 물론이요, 성사 자체도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복음화 도전에 맞서기에 충분하지 않다. 진 주교는 천주교 신앙과 실천에 있어 이렇듯 너무나 전형적인 편향의 결과를 기탄없이 평가한다. 개신교 신자의 극적인 증가와 비교할 때 중국 천주교 교회의 신자 증가는 정체되어 있다. 진 주교에게 있어서 개신교의 성공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우리 자매 교회, 즉 개신교 전체 교파는 모두 복음 선포와 자선 활동에 큰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천주교 교회에 대한 규제가 심하다는 사실이 실적 부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진 주교의 두 번째 요점 - (2) “천주교 신자인 우리 모두는 복음을 위해 사제 및 수녀와 협력하며, 복음 전파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은 협력을 위해서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서로에게 책임을 묻는 파트너십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봉헌 생활을 하는 우리 사제, 수녀, 신학생은 미사성제와 성무일도서 낭독이 끝났다고 해서 교회 문을 닫을 수 없습니다.… 낮시간 동안 교회 문은 열려 있어야 하고, 사제들은 언제나 방문객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어야 합니다.” 성직자의 일원이 되는 것, 좀 더 광범위하게 표현하여 '봉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된다고 해서 여유로운 생활 방식에 대한 특권적 접근으로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박해의 시기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성직자가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은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고 심지어 칭찬할 만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의 세계에 온전히 함께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핑계로 사용하면, 복음 전도의 새 시대에 이런 태도는 비도덕적인 것이 될 것이 뻔하다.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새로운 파트너십의 의미를 되살리기를 바라는 진 주교는 400주년을 맞이하여 “복음 선포 사업 강화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영성과 기도생활을 강화해야 합니다. 형식적 의례, 성지순례, 모임, 단체 여행만 중시한다면, 우리는 헛된 수고만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구의 모든 본당에서 기도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고 요구하고 있다. 그는 에어컨이 완비된 버스를 타고 문화 관광을 하는 것, 심지어 가톨릭 성지로 가는 순례가 복음 전파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진 주교의 세 번째 요점 – (3) “복음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희생정신을 재발견해야 합니다“라는 말은 상하이 교회에 ‘희생 정신’의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희생정신은 천주교 신자들이 마테오 리치와 그의 동료들과 같은 선교사들을 기리는 존경심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수용하는 것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중에 '종교 생활을 시작한 것이 가장 큰 희생이 아닙니까? 제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고 하느님께 말씀 드렸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 주교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는 예수님의 경고를 환기시켜 준다. 하느님은 우리의 실질적 활동을 원하시며,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진 주교는 자신도 이 경고를 마음에 새겨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며 “모든 성직자와 수녀들에게 하루에 두 번씩 자신을 성찰”할 것을 권한다. 그는 이러한 규율이 유교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며, "저는 이 관습을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직무들은 단순히 성무일도를 읽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말하기를 '나는 하루에 세 번씩 나를 성찰한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우리의 삶을 반성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성 이냐시오식 ‘특별 성찰’을 유교의 자기 수양 관행과 동일시하는 것은 진 주교가 그의 선조인 마테오 리치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의 중국 천주교에서 지혜 전승의 수렴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같은 맥락에서 진 주교의 네 번째 요점 – (4) “희생정신과 함께 봉사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는 희생정신이 복음화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서는 ‘봉사 정신’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봉사 정신은 불평 없이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짐을 지고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이미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중국의 부모들에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그들의 가족 부양 봉사를 자세히 설명한다. "저는 그들을 존경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일이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용히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불만의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평하지 않고 기꺼이 희생합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데 반해, 그들은 진정으로 위대하다고 느낍니다."라고 말한다. 진 주교는 세상과 단절돼 있어 영적인 것과 거리가 먼 성직자들의 생활방식을 부모들의 봉사 정신과 대조하려는 의도로, "아침 미사가 끝나면 교회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성직자와 수녀들이 있습니다.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갖고 노는 것입니다. TV와 인터넷 컨텐츠에는 뉴스, 게임, 도박, 폭력, 섹스, 사업과 같이 모든 것이 포함돼 있습니다. 물론 학문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어 누구라도 원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사로잡히게 되어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은 서둘러 주님께 영혼 구제를 간구해야 합니다. 복음화, 봉사, 희생은 마음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우리 소명의 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진 주교는 교회(성직자와 평신도)가 과거 박해와 궁핍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새로운 중국 현실로 함께 나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했다. 상하이의 천주교 신자들이 자기 안에서 영적 부활의 은총을 발견하고 중국의 모든 선한 인민들과 화합하기 위해 함께할 수만 있다면, 미래의 문이 열려 있다 하겠다. 진 주교와 모든 중국 천주교인들 안에서의 화해 과업진 주교의 이러한 진술은 가택연금, 재교육 수용소, 감옥에서 수년간 지낸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1982년 문화대혁명의 여파와 중국 헌법상 적법한 종교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변화된 정책을 고려하여, 진 주교는 중국천주교애국회(CPA)에서 봉사하기 위해 서품될 사제직 후보 교육을 책임지는 셔산(Sheshan) 신학교 학장직을 수락했다. 몇 해가 지난 1985년, 진 주교는 바티칸의 승인 없이 보좌주교(auxiliary bishop, 승계권이 없음)로 임명이 되었고, 동료 예수회원이었다가 1960년 CPA에서 축성되었던 장자수(Zhang Jiashu) 상하이 주교가 사망하자 1988년 진 주교가 후임 주교가 되었다. 그의 임명을 둘러싼 논란에도 진 주교는 주교직을 계속 수행했으며, 2005년 부주교(coadjutor bishop, 승계권이 있음)로 바티칸의 공식 인정을 받게 된다. 진 주교와 요한 바오로 2세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진 주교의 개인적인 용기와 지혜를 이해하려면 이 복잡한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천주교 신앙에 대한 진 주교의 진정성은 그가 27년 동안 자유를 박탈당한 시간을 견뎌냈다는 사실로 보아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집권했을 때 진 주교는 로마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있었다. 새 정부가 이미 천주교 교회에 대해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관련된 위험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진 주교는 1951년 고국 상하이로 돌아왔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특히 경제 및 사회 발전 분야에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협력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여전히 외국 선교사들이 지배하는 교회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두려움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는 유럽인이 아닌 중국인의 이익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관리할 중국 주교회의 수립을 제안했다. 그 제안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자 진 주교는 신학교에 집중했고, 그곳에서 선교사들의 이탈로 인해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중국 사제들을 준비시켰다. 몇 년 후인 1955년 그는 다른 사제, 주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진 주교가 1980년대에 복역을 마치고 사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제 그를 애국회에 협조한 '유다'로 보는 중국과 그 밖의 지역 동료 천주교인들의 회의적인 태도를 견뎌야 했다. 이를 감안하면, 진 주교가 왜 신학교에서 그의 직책을 다시 맡았고, 훗날 상하이 주교직을 수락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CPA가 어깨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는 사제양성의 필요성을 느꼈다. 중국 전역에 기껏해야 400명의 사제가 300만 천주교 신자들에게 봉사하고 있었다. 그는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에 젊고 교양 있는 사제가 필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진 주교는 '외국인 친구'를 통해 로마에 허락을 요청했다. 공산당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학교를 다시 열라는 것이 로마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래서 진은 많은 기도 끝에 중국 천주교에 가장 큰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로마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천주교회가 생존케 하라'고 말했습니다."[4] 진 주교는 자신의 노력을 설명하면서[5] 예수께서 하신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그렇습니다. 이곳 상황은 너무 복잡해서, 뭐랄까, 저는 뱀도 되고 비둘기도 되어야 했습니다 … 정부는 제가 바티칸에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고 바티칸은 제가 정부에 너무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부 통제와 바티칸 요구 사이에 끼어 있는 미끄러운 물고기입니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 이곳의 교회는 폐허였습니다. 전임 주교 [알로이시오 장자수, SJ – 불법 축성됨]의 후임자로 저는 전 세계 천주교 신자들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내서 이곳 상하이의 천주교 공동체가 회복할 수 있는 자금을 요청했습니다. 제가 받은 돈의 대부분은 독일에서 왔으며 일부는 미국 및 기타 유럽 국가에서 왔습니다. 저는 바티칸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천주교 미사에서 어떻게 교황을 위한 기도를 복원시켰는지 이야기한다. “당시 정부에서 천주교에 두 가지를 금지시켰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을 시행하지 못하게 했고(바티칸에 항복하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이므로) 미사 중에 교황을 위한 기도 낭송이 금지되었습니다. … 당국에 미사에서 교황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베이징을 10번이나 방문했지만 당국은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 미사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독일인 친구에게 연락하여 가능한 한 많은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을 모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는 공의회 이후였고 모두가 미사 경본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교황을 위한 기도가 담긴 400권 이상의 버려진 책을 저에게 보냈습니다. 저는 또한 상하이에서 사본을 인쇄하여 다른 곳에서 사용하도록 보냈습니다. 저는 해냈습니다. 이때가 바로 미사에서 교황의 이름이 다시 공개적으로 언급된 시기입니다.” 그러한 희망적인 변화의 조짐이 있기는 했지만, 진 주교는 중국의 천주교 공동체 화해라는 도전과제를 일축하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중국에서 지금 저희와 지하교회 사이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실제로 분열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승인된 교회는 완전히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의 철저한 조사 대상이며, 따라서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먼저 일반적인 용어로 상황을 대략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하교회가 중국의 진정한 천주교이며 교황에게 진정으로 충성하는 유일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이 승인된 공동체보다 더 순종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체로 사실과 다릅니다. 실제로 정부는 항상 우리의 현황을 알고 있고, 우리는 당의 요구에 묵종하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온유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진 주교는 지하교회도 부조리의 그물에 걸렸다고 솔직하게 지적한다. “반면 지하 공동체는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교회법에 따르면 사제는 교구 주교의 관할 하에 있어야 하지만 지하 성직자는 의지에 따라 자유로이 중국 전역을 떠돌아다닙니다. 이것이 교회법에 순종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교황이 최근 중국에 편지[6]를 보냈을 때, 편지에 조심스럽게 복종한 것은 공식 공동체였습니다. 지하 천주교는 이를 거의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이것이 교황에 대한 순종입니까? 또한 교황이 중국의 두 개 천주교 공동체가 차이점을 치유하고 하나의 교회로 일할 것을 촉구했을 때, 홍콩의 젠 추기경은 지하교회에 승인된 공동체에 대한 반대 입장을 확고하게 유지해 나가라고 격려했습니다. 이것이 교황이 원하는 것입니까?” 진 주교는 자신의 주교 서품의 유효성을 주저 없이 인정한 요한 바오로 2세를 시작으로, 2007년 베네딕토 16세가 중국 천주교에 보낸 교서로 이후 확실해진, 중국에 대한 교황들 태도에 대한 중요성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잡지 <30Giorni>의 이탈리아 기자인 잔니 발렌테(Gianni Valente)와의 이전 인터뷰에서 진 주교는 화해 과정에 대한 자신의 장기적인 비전을 공유했다. 완전한 친교는 “교황의 권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정부의 통제 요구를 충족시킬 잠정적 해결책을 … 찾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중국의 주교 임명과 관련하여 … 우리 교구가 후보자를 추천하고, 그 후보자 지명에 대해 중국 정부 당국과 바티칸에 임명을 요청하는 것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이 목표가 달성되고 후보자가 책임을 수락한다면, 새 주교의 축성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7] 진 주교가 열심히 강조했듯이, 교회 안에 공식적인 분립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왜 중국에 있는 두 교회에 대해 이야기합니까? 천주교 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회 내의 두 그룹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바티칸의 권위를 인정하고 중국 당국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첫 번째 그룹과 바티칸의 권위와 중국 정부의 권위를 모두 인정하고 양자와 대화하는 두 번째 그룹이 그것입니다. 저는 대화와 차이점 극복을 통해 이 두 당국과의 협력과 상호 존중에 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 방향으로 다양한 조치가 취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일한 접근 방식은 모든 당사자가 대화와 협력을 모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그리스도인이 정부 당국과 법에 대해 취해야 할 가장 현실적인 태도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주교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07년 서한에서 인용한 예수의 말씀을 언급하며 답변한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 22,21) "그리고 저는 우리 모두가 그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진 주교의 견해에 따르면, 최근에 애국회 소속의 서품된 사제들은 실제로 복음화의 일을 하고 있으며, 마땅히 하느님과 카이사르에게 가야할 것을 어떻게 바쳐야 하는지에 대한 긴장과 논쟁은 신앙심을 위한 그리스도인 투쟁의 정상적인 부분이다. "우리 교회에서 복음화가 계속 진행 중이고 활동적이며, 어느 국가든 존재할 교회-세상 간의 관계의 어려움과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상하이 교구에서는 천주교 신자가 증가하고 있으며 1950년 이전에 서품된 사제는 현재까지 거의 없습니다. 현재 76명의 사제가 있으며, 그중 90%가 셔산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후 지난 20년 동안 서품을 받았습니다. 다른 교구에 있는 사제들은 거의 모두 새로운 세대에 속하며 소중한 그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교회는 오늘날처럼 번영한 상황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애국회와 바티칸 간의 화해를 추구하겠다는 진 주교의 약속을 고려할 때, “중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보호하고 주장해야 할 본질은 무엇입니까? 중국에서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전달할 더 적절한 방법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진 주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복음 선포로 확산돼야 합니다. 복음이 선포되고 살아 숨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핵심은 미움이 아닌 사랑, 분열이 아닌 화합, 어린아이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올해 상하이 교구는 자선 활동을 확대하고 활성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과 실업자가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며 때때로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예술에서 신학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지역 교회의 특징을 보호하고 지원하고 방어해야 합니다. 예술 분야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예술 작품이 유럽 작품에서 복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중국 예술, 문화 및 신학에 속하는 특성을 활성화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이 작업은 그럴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이 세운 장애물에 자주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중국 교회가 전환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대화와 상호 존중과 이해의 풍토를 조성하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필요한 시간을 들여서, 단계별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 주교는 2010년 앤서니 클락(Anthony Clark)과의 인터뷰에서, 화해의 주요 장애물은 은퇴한 홍콩 주교인 요셉 젠 추기경(Joseph Cardinal Zen Ze-kuin)과 리우 바이니엔(Liu Bainian) 애국회 주석, 이 두 명의 중국 천주교 지도자 간 개인적 갈등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이 두 사람은 현재 중국 교회의 장애물이며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지하, 지상 공동체가 취한 노선을 화합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리우가 이곳의 교회가 완전히 독립되기를 바라는 한, 일부 중국 가톨릭 신자들은 지하에 남을 것이고, 젠 추기경이 지하 공동체에 분리된 채로 남아 있으라고 말하는 한 일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 천주교의 미래에 대한 진 주교의 희망은 바티칸과 중국 정부가 2018년 9월 22일에 체결한 중국 천주교 주교 임명에 관한 잠정 합의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8] 그 희망은, 관련된 복잡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계획에도 존재한다. 진 주교, 그리고 마테오 리치의 유산 2010년 마테오 리치 서거 400주년을 맞아 진 주교는 2009년 12월 8일 또 다른 사목 서한인 “리 마또우(Li Madou, 리치의 중국 이름)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이는 중국 교회와 사회에 대한 리치의 역사적 공헌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미래 발전에 있어서 리치의 중요성에 대한 진 주교의 견해도 포함되어 있다. 진 주교에 따르면 리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 중국 문화에 대한 사랑, 유교 사상에서도 발전된 덕목인 스승과 벗에 대한 존경, 현명하게 기회를 포착하는 것과 부단히 공부해서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과 같이 우리 모두가 여전히 배울 수 있는 탁월함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그는 리치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요약 평가했다. “리치가 중국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중국에서 추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리치가 서광계와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중국에 서양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의례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천주교는 중국에서 번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황제가 서구의 기술을 채택했다면 중국은 더 강력히 외세 침략에 저항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교회 지도자와 중국 당국의 '오만과 편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리치의 노력과 그 이후의 시기에 발생한 실수를 통해 배운다면, 잠정 합의가 열어준 기회에 응하면서, 복음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준수하기 위한 우리 자신의 노력이 계속되도록 격려되어야 한다. 진 주교는 참으로 간결한 일침을 놓는다. “중국에서는 중국인이 되십시오. 중국인을 외국인으로 만들지 마십시오.”[9] 필자 소개: 스테판 로쓸린(Stephan Rothlin)은 예수회 신부로, 현재 마카오에 있는 ‘마테오 리치 연구소(Macau Ricci Institute)’ 소장이다. [1] 알로이시오 진루셴 주교는 1916년 6월 20일 태어나 2013년 4월 27일 향년 97세로 사망했다.[2] 참조. 2008년 Tripod 28권 149호 “상하이 천주교 400년: 알로이시오 진루셴 S.J. 주교가 2007년 크리스마스에 발행한 사목 서한. (www.hsstudyc.org.hk/en/tripod_en/en_tripod_149_02.html). 사목 서한의 제목은 상하이 천주교 400년이며, 날짜는 "2007년 크리스마스"이다.[3]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비전과 그 안에서 복음화의 새로워진 우선순위는 교황 권고인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분명히 나타난다.[4] 아담 민터(Adam Minter), 대서양(The Atlantic), "신앙을 지키기(Keeping Faith)" (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2007/07/keeping-faith/305990), 2007년 7월-8월.[5] 진 주교의 본 발언과 이후의 발언은 Ignatius Insight의 A. E. Clark과의 인터뷰, "No Easy Answers: An Interview with Shanghai's Bishop Aloysius Jin Luxian, S.J."에서 발췌했다. (www.ignatiusinsight.com/features2010/aclark_noeasyanswers_july2010.asp), 2010년 7월 23일.[6] 진 주교는 2007년 5월 27일 중화인민공화국 천주교 교회의 주교, 사제, 봉헌 생활자와 평신도에게 보낸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서한을 참조하고 있다.[7] 참조. 2004년 30Giorni, No. 12, G. Valente, "Il futuro visto da Shanghai", 알로이시오 진루셴 주교와의 인터뷰, (www.30giorni.it/articoli_id_6264_l1.htm).[8] 화해에 대한 진 주교의 희망을 확인 시켜주는 것으로 보이는 2018년 9월 22일의 잠정 합의를 염두에 두고 A. Spadaro(ed.), La Chiesa in Cina: un futuro da scrivere, Milan, Àncora, 2019의 수필집 참조.[9] 진 주교의 이마두(리마또우)의 노래 서신 인용문은 2009년 12월 28일 AsiaNews.it의 젠위안(Zhen Yuan)의 보고 요약에서 발췌한 것이다. “Mons. Jin Luxian: Cattolici di Shanghai sulle orme di Matteo Ricci”(www.asianews.it/notizie-it/Mons.-Jin-Luxian:-Cattolici-di-Shanghai-sulle-orme-di-Matteo-Ricci–1721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