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선 벨라뎃따(평화사도 1기 & 동화작가, 평화운동가) 봄볕이 따사롭고, 봄바람이 코끝을 간질이니 길 나서기 좋은 계절이다.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 사행하천(蛇行河川)인 임진강이 흐르는 파주는 발길 닿은 곳마다 금수강산이다. 파주에 정착한 지 10년이 넘어가는 동안 파주 땅 여기저기를 다니는 호사를 누렸다. 조선 후기 문장가였던 유한준(1732-1811)의 말을 빌어 그의 후손인 유홍준은 나의 유산 답사기에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파주 땅을 밟고, 땅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 사이 시나브로 파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코로나19로 갑갑한 시간을 보냈다면, 지금 당장 칠중성(七重城)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서 보자. 사적 47호인 칠중성은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중성산에 있는 삼국 시대 산성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 온 후, 눈 쌓인 날, 햇볕 쨍쨍한 날 모두 정겨운 곳이 칠중성이다. ‘일곱 개의 무거운 게 있는 성인가?’ 흔히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데 백제 때는 임진강을 ‘칠중하’라고 불렀다. 칠중성 초입에 적성향교가 있다. 향교가 보이면 자동차를 세우거나 걸음을 멈춰보자. 그곳에 하마비(河馬碑)가 있다. 이곳에서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말(자동차)에서 내려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을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적성향교를 둘러보았다면 드디어 칠중성을 향해 출발! 여기서부터 중성산 꼭대기까지 걸어서 올라가도 큰 무리가 없다. (자동차를 타고 조금 더 올라갈 수도 있다.) 칠중성은 해발 149m의 중성산 정상부와 그 남서쪽에 위치한 해발 142m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세워진 테뫼식으로 규모가 작은 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은 머리에 화관을 쓴 것처럼, 정상 부근에만 띠를 두르듯 빙 둘러 쌓은 산성을 말한다. (대부분은 산기슭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정상부까지 계곡을 하나 또는 여러 개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저 여기 있어요.’ 운 좋은 날에는 잘 익은 오디와 산딸기가 얼굴을 쏙쏙 내민다. 뜻밖의 간식거리로 입이 즐겁고 발걸음은 가볍다. 천천히 오르다 보면 칠중성 안내판이 보인다. 벌써 절반 이상 올라왔다. 다리쉬임할 겸 안내판을 차근차근 읽어보면 칠중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칠중성 © 장경선 정상까지의 길은 가파르거나 험하지 않아, 어린이와 어르신도 느릿느릿 걸어 오를 수 있다. 걷다가 길가로 손 내민 칡넝쿨이 있다면 꺾어서 칡넝쿨 화관을 만들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들꽃이나 자연 생태에 관심 많은 이웃이 옆에 있으면 산 오르기가 한층 흥겹다. 동글동글, 둥글둥글, 길쭉길쭉한 똥 모양과 크기만 보고도 토끼 똥인지 고라니 똥인지 단박에 알아맞힌다. 어디 그뿐일까. 발자국을 보고 멧돼지가 사는지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오르다 보면 ‘벌써 정상이야?’ 하고 놀랄 것이다. 탁 트인 정상이 어서 오라고 나를 반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식혀 주는 건 덤이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임진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감악산과 적성, 파평도 볼 수 있다. 쾌청한 날에는 멀리 개성의 송악산까지 보인다. 칠중성은 개성에서 한양(서울), 개성에서 파주를 이어 주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 요충지였다. 칠중성 © 장경선 기원전 1년부터 백제 땅이었던 칠중성은 고구려가 차지하였다가 이후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다. 7세기 전반에는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항쟁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최북단 지역으로, 나당전쟁 때 당나라 군대를 저지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UN군으로 참전한 영국군 글로스터 연대 4천 명이 4만 2천 명의 중국군과 맞서 싸웠던 격전지였다. 이를 ‘설마리 전투’라고 부르고, 영국에서는 ‘임진강 전투’라고 부른다. 남의 나라 전쟁에 외국인 부대였던 영국군과 중국군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눈 곳이다. 전투의 시작은 칠중성이었지만 중국군 공세에 밀린 영국군은 설마리 계곡까지 후퇴하였다. 영국군의 값진 희생으로 한국군과 UN군은 수도 서울을 지킬 수 있었다. 칠중성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등록문화재 407호)이 있다. 1992년 11월에는 찰스 왕세자가, 1999년 4월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문하여 추모비에 헌화해 화제가 됐다. 정상에서 내려오면 옆으로 난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삼국 시대 때 돌로 쌓은 성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군부대에서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풀을 베어 놓지만 돌아서기 무섭게 풀이 쑥쑥 자라니, 긴 바지에 운동화를 신는 게 좋다. 여기가 아니더라도 산 이곳저곳에서 2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돌들을 볼 수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칠중성은 남아 우리를 반기고 있다. 할 말이 많아 보인다. 말 없는 말들.웃자란 풀들을 헤치고 갈 수 있는 데까지 성터를 걸어 보길 바란다. 현재의 내가 과거를 만나고 다시 현재의 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옛 성터를 걷는 시간은 풍요롭고 사색은 깊어질 것이다. 칠중성 © 장경선 “이거 고구려 때 기와 아니에요?”“신라 기와 같은데.” 한번은 함께 간 아이가 기와 조각을 주워 보여 주었다. 틀림없는 신라 기와라며 박물관에 의뢰를 해야겠다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너도나도 신라 기와 찾기에 열을 올렸다. 칠중성은 2000년 전, 아니 훨씬 오래된 시간이 지금으로, 다시 미래로 이어진 공간이다. 내가 딛고 서 있는 길의 역사를 알게 되면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기와 한 조각까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 담긴 이름 모를 이들의 노고로 우리가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