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석(베드로) 신부 | 민족화해위원장 1990년대 중·후반 북한지역에서는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북한 외무성은 공식적으로 22만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정확한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에는 적게는 수십만 명, 많게는 200만 명 이상이 죽었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굶주리는 모습은 1997년 10월 미국 CBS 뉴스에 방영되며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는데, 당시 북한을 취재한 기자는 북한 인구의 5분의 1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북한의 고난을 바라보면서 남한 정부도 본래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쌀이 부족하면 외국에서 수입을 해서라도 북한을 지원하겠다.”며 지원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남한은 일본 등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지원해야 한다면 진행을 서둘렀고, 남과 북은 1995년 6월 21일 베이징에서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북한에 쌀 15만톤 무상 제공 합의’ 후 남북한의 대표 모습 ©한겨례(1995.6) 이러한 배경에서 6월 25일 쌀 2천 톤을 실은 배가 북한의 청진항으로 출발했습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한의 쌀이 북한에 제공되면서 남북관계에도 청신호가 켜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 주민의 생존과 직결됐던 쌀 지원 사업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인공기 게양사건’으로 알려진 남북 간의 갈등이 불거진 것입니다. 사실 베이징 대북 쌀 지원 회담 때 남과 북 쌍방은 남측 선박의 북한 항만 입항 시 요령까지도 미리 협의를 했었습니다. 즉 쌀을 실은 남측 선박이 북측 항구에 입항 시 파일럿 지점에서 모든 기를 내리기로 구두 합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차대한’ 합의가 현장에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쌀을 싣고 청진항에 입항한 씨아펙스호는 국제관례에 따라 태극기와 인공기를 달고 입항하려 했고, 북한은 태극기를 내리도록 해 결국 인공기만 올린 채 하역 작업을 하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남한의 보수 언론은 연일 북한의 ‘오만불손’을 비난했습니다. 북한이 남한 선원들을 위협하여 태극기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인공기를 게양했다는 등 자극적인 보도가 이어졌고, 남한 정부도 북한 측의 사과가 없으면 쌀 지원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며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북측 회담 단장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베이징 쌀 지원 회담은 같은 해 9월 26일 열린 제3차 회담을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최근 조선중앙통신은 최초로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하다는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그동안 코로나 확진자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북한 당국이 사태의 심각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의료 시설이 부족한 북한에서 백신도 맞지 못한 주민들의 피해가 무척 클 것이라는 예측이 우리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합니다. 30여 년 전 북한 주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고난의 행군’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