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석 베드로 신부(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소장) 필립 크로스비(한국 이름 조선희) 신부님 ©columban.org.au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춘천교구 홍천 본당에서 사목했던 크로스비(Philip Crosbie) 신부는 1950년 7월 6일에 북한군에 의해 체포됐다. 크로스비 신부는 춘천교구의 책임을 맡고 있던 퀸란 몬시뇰, 캐너번 신부 등과 함께 춘천에 억류되어 있다가 7월 16일 서울로 호송됐다. 이후 이들은 그곳에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 그리고 다른 포로들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겪었다. 이 혹독한 포로 생활 가운데 캐너번 신부는 1950년 12월 6일 폐렴으로 병사하여 압록강변에 묻혔다. 다행히도 퀸란 몬시뇰과 크로스비 신부는 각각 1953년 4월과 6월에 석방됐다. 포로 생활을 하던 크로스비 신부는 1952년과 53년 사이의 겨울에 자신의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몽당연필과 종잇조각을 가지고 메모를 시작하다가 체코제 연필을 얻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펜과 잉크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본까지 만들었던 수기의 첫 원고는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압수당했고, 석방 이후 다시 쓴 수기가 훗날 책으로 출간됐다. 크로스비 신부, 원서 "Pencilling Prisoner" (왼쪽)/ 한국어판 "기나긴 겨울"(오른쪽) 선악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 비참한 전쟁을 기록한 이 책은 북한군의 만행뿐 아니라 남측 경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도 언급하고 있다. 책에서는 전쟁 발발 직후 크로스비 신부를 찾아온 한 소녀가 공산주의자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체포된 20여 명 가운데 절반이 근방의 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그들(시신들)의 손은 뒤로 묶여 있었고, 머리에는 총알구멍이 있었다. 소녀의 오빠가 포함된 나머지 절반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소녀의 오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성적이고 부지런하며 매우 호감이 가는 청년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가 공산주의와 관련된 것은 일본의 한국 통치가 끝난 직후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중략) 한동안 그는 아마 공산주의가 그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회악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곧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중략) 그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소요를 일으킬 때마다 그는 체포되었고 위기를 넘길 때까지 당연한 일처럼 투옥되었다.”(조선희, 기나긴 겨울, pp. 38-39.)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최근 예수회 간행물 편집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 용기 있는 증언을 하셨다.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노력에 관한 질문에서 교황님은 “빨간 모자(Little Red Riding Hood)는 좋고 늑대는 나쁘다는 일반적인 패턴에서 벗어나야 하며, 여기에는(전쟁에서는) 형이상학적 선인과 악인은 없다.”라고 역설하셨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끝나지 않은 한국 전쟁에서도 선과 악은 명백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흑백논리를 넘어서는 진정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이 땅에서도 실현되는 은총을 청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