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원(북한대학교대학원 박사 수료) 북한에서의 일상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이런 반응을 접한다. “우리도 옛날엔 그랬는데….”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북한의 현실이 남한과 꽤 다를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 그러다 그 다름이라는 것이 기껏 시차(時差)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마주하면 의외라는 표정과 동시에 익숙함 같은 정서적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예전에 ‘학교 수업이 끝나면 북한의 학생들은 무엇을 하고 노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남한처럼 사교육이 당연시되지 않았으니 학원에 갈 일도 없고, 학생들은 대부분은 학교를 관리하거나 사회적 노동에 동원된다. 소학생(초등학생) 때부터 스스로 교실과 학교 운동장 청소를 하다 보니 모두 청소에는 달인이 된다. 봄이 되면 주변 야산에 나무를 심으러 갔고, 고속도로 주변에 코스모스를 심었던 적도 있었다. 고급중학교(고등학교) 1학년생이 되면서부터는 한 달 넘게 ‘농촌지원’을 나가 농장에서 숙식하면서 농사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4월에 새 학기가 시작돼 조금 공부하다 4월 말부터 5월 말 혹은 6월 초까지 동원되는 농촌지원을 다들 싫어했다. 농사일이 힘든 건 기본이고, 특히 여학생들은 피부가 까맣게 되는 게 싫었으며, 다리에 둘러붙어 피를 빨아먹던 거머리는 지금 생각해도 소름 끼칠 정도로 싫은 추억이다. 그래도 그때는 아이들이라 지칠 줄 몰랐고, 그 속에서도 즐거움과 추억을 만들었다. 쉬는 시간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편을 갈라 ‘말타기(민속놀이로 남한의 말타기와 비슷하다)’를 즐겼고, 말이 무너지면서 넘어진 어느 아이 얼굴에 묻은 소똥은 모두의 웃음보를 터뜨리기도 했다. 매일 눈을 뜨면 이른 아침을 먹고 해뜨기 전부터 차가운 논밭에 들어가 모내기를 해야 하는 것이 끔찍했지만, 어느 학급에나 한두 명씩은 있는 익살꾼 오락부장이 온치(음치를 이르는 북한말로 音痴의 일본어 발음에서 유래했다.)로 뽑아내던 노랫가락은 지금도 애틋한 기억이다. 2021년 황해도 지역 농촌지원 © 노동신문=뉴스1 그렇게 농촌지원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면 여름이 시작된다. 여름이면 매일 파리를 30마리씩 잡아 바쳤다. 수업이 끝나거나 휴식시간이 되면 다들 파리채 한 개씩 가지고 야외 변소(화장실)로 향했다. 거기에 파리가 제일 많았기 때문이다. 쉬파리로 불리는 큰놈들은 잡으면 반으로 갈라 2마리로 변신시킬 수 있었다. 꼬장꼬장한 위생담당(모든 학급에 있는 학생위원회 임원으로 옷차림, 정리 정돈 등 위생 상태를 매일 체크했다.)은 매일 어김없이 잡은 파리가 몇 마리인지 세어 받았다.일반적으로 북한의 가정집에서는 파리채를 잘 쓰지 않았다. 벽지에 앉아 있는 파리를 잡으면 그 흔적이 남아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방충망으로 잘 차단하지만, 간혹 용케 들어온 파리들은 출입문을 열어놓고 수건 두 개를 양손에 감아쥔 다음 휘휘 저어 밖으로 쫓아 보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듣고 있던 모두가 빵 터지고 말았다. “북한은 파리를 잡았어? 우리는 쥐를 잡았다는데….”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쥐꼬리를 준 사람도 있었대.” “북한도 파리 잡아주며 고백한 거 아니야?” 다들 한마디씩 거들며 웃고 떠들었다. 그러고는 “역시, 우리는 한민족이야!” 하는 뻔한 감탄사로 마무리했다. 1970년대 남한의 쥐잡기운동과 1990년대 북한의 파리잡이는 몹시도 닮아있다. 물론 지금은 남한도 더 이상 쥐잡기운동을 하지 않고, 북한도 파리잡이를 과제로 내주지 않는다. 하나의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남북인지라 70여 년의 기나긴 단절과 의도적인 다름의 추구에도 여전히 우리는 다름보다는 같음이 훨씬 많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북한에서 우리 세대가 겪었던 일들을 남한에서는 부모님 세대가 겪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남북한의 차이는 체제와 이념의 차이보다는 시대적 차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차이와 더 가깝기도 하다. 북한의 다른 지역에 살았던 한 친구는 메뚜기잡이에도 동원됐었다고 했다. ‘인민군대 아저씨(군인)’들이 간식으로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게, 매일 논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아 유리병에 넣어 학교 선생님에게 바쳤다고 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본인의 집에서 메뚜기를 볶아 비닐봉지에 포장한 다음 학교에 냈다고 한다. 지역적 특성에 따라 어린 시절에 동원돼 했던 일도 천차만별이었다. 금은화 꽃잎을 따기도 했고, 봄나물을 캤으며 솔잎을 줍기도 했다. 군대지원, 수출원천동원(1990년대부터 외화벌이를 위해 광범위하게 대중을 동원해 수출품을 위한 각종 지역 특산물을 모았다.) 등 만성적인 대중운동에는 학생들도 예외 없이 동원됐다. 평안남도 안주시 학생들이 모내기 동원 캠페인을 벌이는 모습 © 캅아나무르/ SPN 서울평양뉴스 북한의 경제가 최근 들어 심각하게 어려워지고 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장기적인 대북제재 속 코로나 팬데믹으로 북한의 한계가 드러나는 모양새다. 어쩌면 올해 북한의 학생들은 다시 메뚜기잡이에 동원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