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영 요셉 신부 (덕정성당 부주임) 신학생 시절의 일입니다. 방학을 하면 신학생들은 지구장 신부님께 보통 인사를 드리러 가는데, 당시 지구장 신부님은 본인이 가면 신학생들이 불편할 수 있으니 밥만 먹으라고 식사비만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방학을 지내다, 제가 지구 신학생 대표가 되던 여름 방학 때, 지구장 신부님께서 신학생들에게 밥을 사 주시겠다며 초대해 주셨습니다. 지구 신학생들에게 날짜를 정해서 지구장 신부님께 말씀드렸고, 식사 전날에도 확인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저는 깜박하고 약속을 잊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핸드폰도 꺼져 있어서 알람도 확인을 못 했습니다. 12시가 다 되어 핸드폰을 켜봤는데, 후배 신학생한테 여러 통의 전화가 와있었습니다. 순간 약속을 잊어버린 걸 알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지구장 신부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신부님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차 타고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OO에서 식사하고 있을 테니 그리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는 길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 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고, 큰 실례를 범했다는 마음에 너무 괴로웠습니다. 식당 문을 열면서 ‘혼날 일만 남았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했더니 신부님께서는 “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라고 말씀하시면서 와서 식사하라고 하셨습니다. 혼을 내기는커녕, 너그러이 받아주신 신부님 덕분에 저는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군가를 용서해 주신 적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용서받았거나, 용서받지 못한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했을 때 우리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고, 무언가에 묶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용서는 묶인 것에서 풀어주는,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용서는 나에게 묶인 무엇을 풀어주는 역할도 합니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항상 미워하고, 욕하고 원망하다 보면, 어느새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하고 그 상처에 얽매여 있게 됩니다. 정작 상처를 준 사람은 신경도 안 쓰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용서는 나와 너를 힘들게 하는 끈을 풀어주고 자유로운 상태로 만들어줍니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이야기는 모두를 따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전쟁이 100일이 훨씬 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일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의 발표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해 어린이 267명을 포함한 민간인 4,149명이 숨지고 4,945명이 부상했다고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 우크라이나 민간인 지역에 수많은 포탄이 떨어져 도로와 건물이 파괴되고, 폐허가 되어 버린 곳이 많은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자국을 공격하러 온 러시아군이 부상당하자, 치료를 위해 그들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사람들의 모습, 포로가 된 러시아 군인들에게 차와 빵을 건네주고, 가족들과 통화를 해 주게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따듯함을 느낍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집이 불타버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적군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은 정의를 넘어 용서와 사랑을 베푼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주민이 준 빵과 차를 받은 투항한 러시아 군인 용서의 사전적 정의는 “잘못이나 죄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끝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용서는 좀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해자에게 보복하거나 그를 회피하려는 동기가 감소하고 자비를 향한 동기가 증가하는 것, 개인의 행복을 위해 부정적 감정과 생각을 극복하려는 신중한 노력, 대개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한 지각이 부정적인 쪽에서 연민의 관점으로 변화하는 것, 상처받은 사람이 가해자에 대한 분노나 적대감을 버리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연민과 자비,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하는 복합적인 심리 과정”입니다.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 연민과 자비를 갖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품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하느님의 마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장)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은 방탕하여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난 뒤 굶어 죽을 지경이 되자 후회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불릴 자격이 없으니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오랫동안 굶고, 죄스러운 마음에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는 아들의 모습을 아버지는 먼저 발견합니다. 그리고 가엾은 마음이 듭니다. 아버지는 먼저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종들에게는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하고 명하면서 잔치를 벌입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의 죄를 묻지 않고 그저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분명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우리 삶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용서의 길은 치유의 길이자, 나와 너, 그리고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길입니다. 우리 이 길을 함께 걸어가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