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원(인류학자) 2022년 『평화의 길』 7월호에서 2021년 강변북로 지나 자유로 초입을 달리면서 보고 느꼈던 풍경을 담았다. 8월호는 그 이후 여정을 다루겠다. 약 1년 전의 경험이지만 2022년 여름에도 별반 달라진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아래의 내용을 2021년에서 2022년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1970년대부터 설치된 자유로(고양) 한강의 철조망 일부분은 철거되었다. 남아있는 철조망도 경비와 경계보다는 울타리 성격이 강하다. 이 모습에서 나는 평화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 강주원, 2022년 자유로 장항IC 쯤부터 철조망의 모양이 달라진다. 윗부분은 V자 뼈대에 쇠고리 원형이 올려져 있다. 이 철조망의 모양 변화와 제거 날짜를 알려주는 기사를 검색하지 못했다. “1970년에 설치”(정근식, 2018, 「냉전·분단 경관과 평화로」, 『황해문화 가을호 100』, 새얼문화재단, 169쪽.)됐던 그 철조망은 2021년 현재 자유로를 따라 목적과 기능을 달리하고 있다. 1970년 전후, 철조망으로 구분되는 한강 하류의 풍경과 삶의 변화를 비롯해 1990년, 자유로 공사 이전의 한강 철조망의 위치에 대한 궁금증은 다른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 한강 철조망은 나에게 한강과 임진강 주변, 민통선과 남방한계선 철조망의 역사를 아울러야 함을 알려줬다. 한강 양옆으로 여전히 김포와 일산의 아파트가 자유로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끝없이 펼쳐진다. 장월IC가 약 1.3km 남은 지점에서 처음으로 77번 국도 표시와 함께 평양, 개성, 남북출입사무소 그리고 임진각, 파주(문산)로 향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교통표지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평양”과 “개성”으로 자유로, 77번 국도가 향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교통표지판이다.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 세월은 쌓이고만 있다. © 강주원, 2021년 2007년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유영호, 2008, 『민통선-DMZ 통일맞이 나들이』, 선인, 75쪽.)로 자유로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이미지는 남북 교류와 관련된 전시회 등에서도 자주 봤는데도 볼 때마다 설렌다. 동시에 이 교통표지판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약 15년 동안을 뒤돌아보게 된다. 이 길을 따라 사람들이 평양으로 얼마나 갔는지를 생각하면 마음은 가라앉는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0년대 중반, 주변을 통해 종종 들었던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2만 원~” 노래 가사가 기억난다. 그래 이 자유로를 따라가면 언젠가는 개성과 평양에 도착하겠다고 혼잣말을 반복한다. 2021년 현재, 그 길은 현재형이 아니고 여전히 미래형이다. 이런 나의 마음과 달리 이중으로 설치된 철조망이 눈에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흘러가 버린 약 15년이 아쉽고 문재인 정부의 약 4년이 야속하다. 그 세월 동안 휴전선을 넘나드는 북한 방문의 규모는 늘지 않고 줄어들었다. 길과 주변 지형의 높낮이가 비슷해지면서 철조망의 키가 더 높아진 것처럼 느껴진다. 자유로가 평양 가는 길임을 알리는 교통표지판이 또 보인다. 파주 출판 도시 휴게소까지 아직 2km 남짓 남았다. 이 지역이 한강 유역임을 알리는 간판이 작게 보인다. 한강 하류로 내려갈수록 자유로 철조망은 약 50년 넘게 이중 철조망 형태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는 남방한계선과 민통선 철조망이 아니다. 이 지역은 DMZ가 아니다. © 강주원, 2022년 철조망이 점점 견고한 모양새로 바뀌는 가운데 “통일경제도시 한반도 평화 수도 파주”라는 문구가 문발IC 주변 풍경을 채우고 있다. 통일이라는 단어를 활용하던 1990년대에서 평화라는 단어가 강조되는 2020년대로 자유로 풍경은 변해왔다. 표지판의 글자가 바뀐 것처럼 한국 사회도 그렇게 살아왔을까? 길게는 약 30년 동안, 짧게는 약 4년 동안 남북 관계에 따라 한국 사회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평화를 현실에서 얼마나 실천했는지가 궁금해졌다. 한편으로 자유로 주변 풍경을 알아가다 보면 평화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선입견과 편견들이 녹아 있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삶의 방식 또한 그곳에 있었다. 평화를 꿈꾸고 현실에서 누릴 수 있는 공간을 한강과 임진강은 품고 있었다. 압록강에서 부딪쳤던 문제의식을 떠올리면 그 밑그림이 선명해지곤 했다.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지역이 가까워지고 있다. 교통표지판은 21km를 더 가면 임진강 이남에 LG디스플레이 단지가 있다고 알려준다. 산허리를 여러 겹 감싸는 철조망 위로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자리 잡고 있다. 무단 촬영 시 처벌을 받는다는 경고판이 계속 보인다. 잠시 차를 세웠다. 2년 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판문점 23km”라고 표시된 성인 얼굴 크기만 한 교통표지판이 도로 중앙이 아닌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이제는 구분하는 눈이 생겼다. 이 전망대 위치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차는 자유로 임진강을 따라 달린다. 불현듯 떠올랐다. 그동안 전망대에서 북한 땅이 보이는 배경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DMZ의 폭은 4km다. 그 공간에는 대부분 비어 있다고 배웠다. 그런데 전망대와 북한 마을 사이는 약 2km다. 남북 사이에 4km보다 짧은 약 2km 거리가 존재하는 이유를 나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전망대 북쪽으로는 남방한계선이 없고 휴전선도 없음을 안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압록강은 남쪽으로, 임진강은 북쪽으로 북한을 바라본다. 그 이외에 자유로 임진강 일부와 압록강에 깔린 기본적인 삶의 존재 조건은 같다. 둘 다 중립 수역이다. 그런데 살아온 방식이 다르다. 압록강에는 양쪽 강변 사람들의 삶이 함께 흐른다. 자유로 임진강은 아니다. 그 차이를 알아봐야겠다. 오두산 통일전망대 밑에서 자유로 오른편으로 약 2km를 가면 통일동산이 나온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묻히기를 희망했던 공간으로 알려진 곳이다. 1990년대 초반 이 일대는 민통선 이북에 포함된 지역(《한겨레》 2021년 10월 27일자, “노태우 전 대통령 장지는 통일동산?”)이었다. 헤이리 예술마을 근처인 성동리 사거리에 민통선을 통과하는 검문소(《경기일보》 2021년 2월 4일자, “개성공단 재개가 남북 평화다”)가 있던 시절도 있었다. 휴전선과 달리 민통선의 위치는 변경돼왔다. 여기에서 자유로 임진강의 역사와 현재가 그려지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 알리고 싶은 공간이 있다. 이는 다음 9월호에 자세히 다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