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샴봉(Michel Chambon), 안토니오 스파다로(Antonio Spadaro), SJ / 발행일 : 2019년 1월 7일 2022년 「평화의 길」 특별 기획으로 이웃 국가 중국의 ‘천주교회’의 역사와 오늘날의 모습, 그리고 바티칸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관련 칼럼을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글의 영역본은 예수회 교양지 「치빌타 카톨리카」(La Civiltà Cattolica)의 <교회 생활Church Life> 코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링크 : https://www.laciviltacattolica.com/urban-catholicism-in-china/ 중국 천주교의 급속한 변화와 새로운 도시 환경에 대한 적응은 사제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기사는 농촌에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중국 도시로 이주한 사업가 평신도 천주교 신자라는 특정 집단에 관한 것으로써, 특정 유형의 중국 천주교 부흥과 관련된 동기, 조직 및 영향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980년대 이후 수십만 명의 천주교 신자들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서 농촌을 떠났다. 오늘날 그들 중 다수가 도시에 잘 정착하여 그들의 천주교 신앙을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부 이주민이 이뤄낸 성과는 단순한 전통적인 본당 생활을 넘어서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지만 중국 천주교에 관심이 있는 많은 대중들에게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이러한 천주교 단체는 일부 개신교 공동체와도 유사한 점이 있으나, 중국 천주교회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고유의 특징과 역동성 또한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기사는 이러한 이주민 천주교 신자들과 그들의 네트워크를 조명하여 그들이 천주교회가 새로운 사회적 조건에 적응하는데 어떠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다루어 보려고 한다. 먼저, 본 기사에서는 농촌 천주교 신자들이 고향을 떠나는 계기가 된 좀 더 광범위한 사회적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중국인민공화국이 최근 겪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다음, 천주교 신자 노동자 네트워크가 대도시에서 어떻게 점차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지, 즉 실질적인 그들 조직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동기 등을 살펴보겠다. 마지막으로 전국의 네트워크를 대조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알아보고, 최근 중국 도시에서의 천주교의 발전을 특징짓는 강점과 과제도 다루어 보고자 한다. 중국의 변혁 1970년대 후반 이후, 덩샤오핑(Deng Xiaoping)의 경제 및 정치 개혁은 중국 사회에 근본적인 쇄신을 가져왔다. 중국은 삶의 질이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도시 중심의 부유한 사회로 점차 변해가고 있다.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더 이상 선진국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여전히 농촌이 많이 남아있고 사회적 불평등도 심각하지만, 거대한 도시 허브는 현재 대부분의 인구를 수용하며 중국의 삶을 재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광범위한 변혁 과정에서 인구의 약 3분의2가 도시에서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직업기회를 찾아 농촌을 떠났다. 초기에는 새로운 일자리가 대부분 단순노동 혹은 제조업에 관련된 것이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직업기회는 매우 다양화되고 전문화되었으며 보수도 늘어났다. 빠르고 급진적인 변혁을 촉진함과 동시에 거대한 빈민가의 생성을 방지하고자 중국 당국은 공간 사용을 신중하게 통제하고 모든 시민에게 거주 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여러 국가기관에서 도시 계획을 면밀히 감시하고 모든 도시 공간의 사용을 규제한다. 이와 동시에, 모든 중국인은 출생 시 도시이든 농촌이든 거주지역 내에서 거주지 등록을 해야 하며 중국 내에서 영구적으로 이주를 하기 위해서는 비싼 허가를 신청해야만 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이러한 규정을 피해서 성장하는 중국 도시 교외지역에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들은 열악한 공장에서 끝도 없이 일하며 단순 상품들을 생산하여 전 세계에 넘치도록 공급해왔다. 그러나 중국 경제가 더욱 고도화되고 다양화됨에 따라, 이러한 과도기적 사회 조건도 변하게 되었고 이주 인구는 현재 중국의 도시로 빠르고 합법적으로 흡수되고 있다. 또한 비경제적 요인도 중국의 급격한 변화를 주도하였다.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가 ‘한 자녀 정책’이다. 1980년대 초반, 중앙 정부는 대부분의 중국 국민이 자녀를 한 명만 낳도록 규제하기로 결정했다. 이 정책의 범위와 결과는 아직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중국 가정의 실질적 현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십 년에 걸친 내전과 주요 혼란(정치적 변화, 기근) 이후, 중국 사회는 독특한 집단적이고 구속적인 사회 정책을 거치면서 오늘날 중국 가정의 구성 방식은 어느 정도 표준화를 이루게 된다. 혈연구조와 가족규모의 지역적, 민족적, 계급적 변화가 감소하였고 대부분의 가정에는 이제 네 명의 조부모가 세심하게 부양하는 한 두 명의 자녀만 있다. ‘한 자녀 정책’은 최근 완화되었으나,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제 한 자녀 이상을 갖는 것을 거부한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향후 더 가속화될 급속한 고령화 문제에 직면해 있다.[1] 중국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새로운 연대 출현 1980년대와 1990년대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변혁이 이루어지는 동안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농촌을 떠났다. 다른 수백만 명의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들도 급속하게 팽창하는 도시로 이주하였고 새로운 호황을 누리는 경제와 함께 자신의 운을 시험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젊고 미혼이며 농촌지역 특유의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우선순위는 돈을 벌어 친척을 부양하고 점점 더 경쟁이 치열해지는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탈농촌 천주교 신자들은 다른 많은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도시 환경에 잘 정착하여 인맥과 저축을 늘려나갔다. 2000년대 초반 천주교 신자 이주민들 중 다수가 부분적으로 거주 자격을 인정받았으며 동향 출신의 배우자와 결혼하였다. 일부는 심지어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자신이 살던 농촌지역 출신의 사람들을 고용하여 이들의 도시 생활 적응을 지원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새로운 도시의 일원이 된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새로운 삶을 건설하고 국가에 기여하는 동시에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고향에 제공하며 이들의 ‘예전 집’과도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중국의 도시들은 거대하고 고도화된 네트워크로 계속 진화하였으며, 도시 네트워크는 지속적인 교통 시스템 개선을 통해 국가 전체를 통합하고 거대한 도시 허브를 서로 연결하였다. 이주민 천주교 신자의 대부분은 처음에는 ‘지하 교회’라고 부적절하게 칭해진 곳에 속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중 다수는 교회가 국가의 엄격한 규제 밖에서 발전하고 지도자들이 공식적인 통제를 거부하는 농촌 환경에서 자랐다.[2] 이주민들이 대도시로 옮겨 오면서, 이들은 곧 도시의 천주교회가 보통 이들이 경험한 농촌 교회와는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모든 도시 교구들이 농촌 교구들과는 실질적으로 다른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도시 천주교의 현실은 농촌에서 이주한 천주교 신자에게는 언제나 놀라운 도전이었다. 지역 관습, 방언, 예식 및 권력 균형 등 다른 모습이 많았다. 각각의 도시 상황에 따라 새 이주민들은 천주교 신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이들의 종교적 유산과 자신의 관계를 재정의할 수 있는 독자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주민들의 노동 강도, 재정 상황의 불확실성, 도시 교회 숫자의 부족 등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교회에 그만 나가기 시작하였다. 거의 매일 수많은 시간 동안 일했기 때문에 이주민 신자 다수가 혼자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일년에 한 번 중국 설날에 고향을 방문하면서 성사를 받았다. 일부는 현지 도시 교회에 나가려고 했지만 심각한 문화적 격차를 겪어야 했다. 먼저, 현지 천주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결정하기 위해 국가 통제와 전례 정통성 측면에서 현지 천주교 공동체를 평가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도시 공동체(둘 다 존재하는 경우 공식 및 비공식 공동체 모두)가 자신들만의 지도자와 규범, 요구사항을 갖춘 이미 잘 조직된 네트워크이며, 새로 온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예를 들어, 암묵적인 공용어가 표준 중국어가 아닌 중국 방언일 경우 해당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부유한 현지 천주교 신자와 빈곤한 농촌 이주민 간의 계급 격차로 인해 많은 이들이 기존의 천주교 공동체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었다. 이주민 천주교 신자들은 분별력과 결단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이 자신의 종교적 유산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초기에는 많은 신혼부부들이 그들의 자녀를 고향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농촌 생활이 비용이 덜 들었으며 이주민들의 자녀는 법적으로 부모의 농촌 거주지에 속하여 농촌에서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또한 일을 해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 양육에 대해 농촌의 조부모와 친척들의 도움을 받는 편이 훨씬 수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녀들이 부모와 분리되고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면서 농촌의 대가족은 천주교의 전통을 신세대에게 전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상황은 덜 만족스러워졌다. 경제적 현실 및 도시와 농촌 생활의 사회적 격차는 계속해서 빠르게 벌어졌다. 이주민들이 더 많은 기회와 이점을 지닌 도시 생활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점점 더 자녀를 농촌에 남겨두는 것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받는 교육은 도시의 교육 수준에 비해 떨어졌다. 조부모들은 초현대적이고 경쟁적인 중국 사회에 대비해 새로운 세대를 준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국 도농 간의 문화적, 경제적 격차는 너무 커져서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거주 지위 합법화 가능성이 열리고 뇌물이 통용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새로 정착한 도시 이주민들은 새로운 학교 교육 기회를 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200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많은 이주 가정이 자녀를 도시에서 양육하기로 결정하고 한 명 이상의 친척을 데려와 자녀 양육에 도움을 받았다. 또한 2000년대의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면 도시에 보다 잘 정착한 천주교 신자들은 새로운 경제적, 가족적 현실 내에서 천주교를 기반으로 관계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천주교 신자들은 전통 기도를 바치기 위해 개인의 집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스로 활동을 조직함으로써 현지 공동체와 상대할 필요가 없었고, 시내에 있는 교회에 나가기 위해 몇 시간씩 대중교통을 탈 이유도 없었다. 처음에는 이들은 외부의 도움(국가 승인, 사제의 감독) 없이 농촌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전례를 단순히 똑같이 반복하였다. 그러나 작은 아파트에 비해 참가자 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이주민 천주교 신자들은 다른 해결책을 찾기 시작하였다. 공장을 운영하는 이들 중 일부는 공장 건물에 딸린 작은 방을 기도모임을 위해 내놓았다. 해당 공장과 인근 지역의 천주교 노동자들은 이러한 공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 비교적 사적인 장소가 제공되면서, 예전처럼 누군가의 가족들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고 모일 수 있게 되었고 비밀유지도 용이해졌다. 더 많은 수입을 벌어들이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소유한 아파트 중 한 채를 비공식적이지만 영구적인 경당으로 바꾸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두 경우 모두, 소유주는 현지 경찰이나 관료들과 따로 이야기 하여 이들이 암묵적으로 이러한 장소들을 인정하고 눈감아 주도록 하였다. 서서히 중국 대도시의 교외 지역 곳곳에 기도 공간이 생겨났다. 겉으로 보기에 임시로 운영하는 소규모 공간으로 보이는 한 딱히 큰 제재를 받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 모임을 운영할 수 있었다. 초반에 이러한 공간들은 임시 환경에서 간소하게 운영되었다. 성화나 성상들은 벽 한쪽 면에 두어서 큰 커튼으로 빠르게 가릴 수 있는 구조로 유지하였다. 좌석은 접이식 의자를 사용하여 모임이 끝나면 치워두었다. 이렇게 단순한 조직으로 운영하면서 천주교 신자 가정들은 일주일 여러 번 저녁에 모여 전통 기도를 바치고 자녀들이 천주교 전통을 받아들이도록 도왔다. 이주민 천주교 신자들이 농촌에서 익힌 천주교 예식은 서서히 가족이라는 범위에 한정되지 않고 그 밖에서도 재등장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천주교 신자가 되는 새로운 방식의 구성 모임이 보다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천주교 신자 이주민들은 그들의 고향 농촌지역에서 사제를 초청하여 일년에 한 번씩 사제가 도시를 방문하여 성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모금을 하기 시작했다. 이주민 신자들의 대부분은 중국 설날(특히 세례식과 결혼식)에 고향을 방문할 때 성사를 받는 것을 선호하긴 했지만, 이미 부부의 연을 맺어 결실을 맺은 결합에 대해 축복을 받고 지은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사제를 모셔올 수 있는 기회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신흥 도시 천주교 신자들의 부가 증가하고 교통이 개선됨에 따라 사제들은 더 자주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급변하는 중국에서 사제들은 이러한 환경을 혁신적인 사목활동을 펼치고 잠재적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그들 중 일부는 심지어 새로운 유형의 순회 사목을 전문으로 삼기까지 했으며 점차 도시 신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쌓아갔다. 이러한 점진적인 변화는 평신도 지도자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도시에 잘 정착한 천주교 신자들은 후원과 현지 인맥을 경쟁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네트워크의 출현을 도우면서 부유한 후원자들은 신흥 도시 천주교 내에서 이들 고향의 집단적 권리를 주장했고, 중국 천주교 내에서 새로운 유형의 지위를 생성했다. 저장성, 푸젠성 및 허베이성 출신 천주교 신자들은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효율적인 도시 네트워크를 수립해 나아가는 역량을 갖춘 것으로 유명해졌다. 이주민 지도자들은 신앙심과 효율성과 관련하여, 그리고 현대 도시 생활에 천주교 관습을 효과적으로 통합시킨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주민 천주교 신자들은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관계를 재정립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적 틀도 재편하였다. 수년 동안, 이들의 가장 중요한 모임은 대부분의 천주교 공동체가 중요시하는 일요일 아침이 아니라 퇴근 후 참여할 수 있는 주중 저녁에 이루어졌다. 근로조건이 상당히 개선됨에 따라 주일 미사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주간 모임과 일 년에 한번 고향을 방문하는 것 외에 이주민 신자들은 새로 적응한 도시에서도 연례 행사를 마련했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 크리스마스가 인기를 끌면서 연례 행사로서 친분이 있는 천주교 신자, 직장동료 및 지인들을 초대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천주교 후원자들은 그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대형 호텔을 예약하여 수천 명의 현지 친구들과 직장 동료, 천주교 신자와 비신자를 초대하고 이틀 이상에 걸쳐 성탄을 다 같이 즐겁게 축하한다. 이러한 사적이지만 대규모로 진행되는 크리스마스 행사는 2000년대 말에 중국 정부의 종교 정책이 다소 느슨해지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또 다른 연례 행사로는 청소년 여름 캠프가 있다. 초기 청소년 캠프는 지역 본당에서 1~2주짜리 어린이 프로그램을 조직하면서 농촌에서 진행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도시 이주민 신자들은 여름에 더 이상 농촌을 방문하지 않는 어린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체 여름 캠프를 마련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도시에서 진행되는 여름 캠프는 각종 조직적 어려움에 직면하였고 다소 제한적인 형태로 운영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이주민 신자들은 전례예식을 통해 신앙을 전수하는 것을 선호한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주간 종교활동이 연례 여름 캠프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이주민 신자들의 다수는 종교에 관하여 보다 합리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는 주일학교나 현대 의 교리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주민들을 위해 활동하는 사제들 또한 여름 캠프의 이점에 대해 회의적이다. 여름 캠프는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는 하지만 신앙의 성장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고 상당한 자원이 필요하며 중대한 정치적 위험을 수반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천주교 신자 이주민들은 여름 캠프와 같은 활동 대신 전례를 직접 보여주어 자녀들이 이를 배울 수 있도록 실천 공동체를 만드는 데 강한 의지를 보여왔다. 2010년대 초반까지 이주민 신자들은 순회 사제를 더 영구적인 방식으로 고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네트워크를 구축해왔다.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일부 후원자들의 주도하에 이주민 신자들은 사제가 상주할 수 있도록 영속적인 재원을 확보한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적 수요에 대응하여, 중국 북부의 일부 비공식 교회는 이러한 유형의 공동체에서 사목활동을 할 사제를 파견하고 있다. 중대한 정치적 혹은 사목적인 갈등이 없는 한, 파견된 사제는 네트워크 활동에 참여하며 도시에 거주한다. 사제는 매주 네트워크의 여러 경당을 순회하며 고해성사와 미사를 집전한다. 네트워크 소속 신자들은 사제의 방식이 괜찮다는 확신이 들면 사목활동을 지원하고 장기 체류를 장려하고자 해당 사제에게 보통 자동차와 전자기기를 제공한다. 일부 대규모 도시 네트워크에서는 자신이 선택한 보좌 신부의 고용을 협상하는 사제도 있다. 신흥 도시 천주교 네트워크는 분명히 어느 정도 입지를 굳혔지만, 전체 교회에는 중요하지만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기여를 하고 있다. 상호 지원과 조직적 기술을 통해 천주교 이주민들은 이제 중국 도시 전역에서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접근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인구 1,500만 명의 한 남부 도시를 살펴보면 4개의 오래된 성당만이 현지 교구 소속이며, 이들은 모두 시내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비공식 천주교 이주민들은 이미 교외 변두리 지역에 10개 이상의 경당을 마련하였다. 공장과 주거용 빌딩 안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경당들에는 주말마다 약 천여 명의 신자가 모이는 반면, 공식 교구에서는 5천~6천 명의 현지 천주교 신자를 수용하고 있다. 많은 천주교 이주민들이 이르기를, 대다수의 동료 신자들이 더 이상 일부러 성당에 나가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도전과 변형 물론 준제도화된 신흥 천주교 네트워크의 성장을 둘러싸고 대내외적으로 갈등이 존재한다. 외부적으로는 특화된 사제 시스템과 함께 비공식 도시 네트워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여기저기서 정치적인 우려가 불거져 나왔다. 2010년대 초 지역 종교 정책에 따라 강력한 규제가 시행되는 동안 이주민 네트워크는 모임 빈도를 줄여야 했으며, 사제들 또한 좀 더 조심스럽게 활동하거나 심지어 잠시 도시를 떠나있어야 했다. 내부적으로는 천주교 신자 고용주의 입지가 강화됨에 따라 고용주와 사제의 직무 수행 간에 네트워크 내부에서 긴장이 조성되었다. 예를 들어, 2013년 한 천주교 신자 고용주가 자신의 대도시에 있는 다른 비공식 경당보다 10배 더 큰 경당을 마련했을 때, 담당 사제는 양가적 반응을 보였다. 매우 잘 꾸며진 새 경당은 해당 네트워크의 발전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러 후원자들의 지원을 받아 새 경당은 다수의 이주민 천주교 신자를 끌어들였다. 곧 이 경당은 네트워크의 암묵적 중심지가 되었고 배후의 후원자들에게 새로운 지위를 부여했다. 당연히 경당의 크기 때문에 지역 경찰은 공식 등록을 요청했다. 천주교 지도자들은 행정 절차 과정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 지역의 공식 주교를 찾아갔다. 주교가 이미 다른 여러 비공식 경당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이는 형식적인 절차였다. 예상대로 지역 주교는 승인을 해주고 새 경당을 축복했다. 그러나 담당 사제는 경당 등록에 반대하고 심지어 폐쇄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의 눈에는 이렇게 큰 규모의 경당은 계속해서 불필요한 관심을 끌고 문제를 일으킬 것으로 보였다. 담당 사제의 말에 따르면, 본인과 보좌 사제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규모는 작더라도 더 많은 수의 경당을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후원자들은 큰 경당을 폐쇄하는 데 동의했고 그들과 담당 사제 간의 공개적인 갈등을 피하는 것을 선호했다. 공개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은 이 경당을 통해 일부 신자들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었고 이 때문에 간접적으로 사제의 사목활동 입지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큰 경당의 급속한 출현과 폐쇄를 통해 사제와 평신도 후원자들 간의 내부 갈등이 중국 천주교 네트워크의 구체적인 확장 또는 축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주었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이주민 천주교 신자들이 도시의 종교 생활을 구성하는 방식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심하다는 점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비공식 교회가 존재하는 도시에서는 천주교 이주민들이 비공식 교회와 연결되어 결국에는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기존 현지 천주교 신자와 이주민 신자 사이의 사회문화적 격차로 인해 이주민들은 종종 독자적인 활동을 조직하게 되었다. 비공식 교회가 없는 지역을 살펴보면, 이주민들은 보통 공식 교회에 접근하여 정기적으로 성사를 받는다. 단, 사회문화적 격차, 이동 거리, 힘든 노동 시간 등으로 인해 이주민들은 교외에 독자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 이는 이주민 신자들이 형성하는 대안 네트워크는 이주민들과 그들을 수용해야 하는 교회 사이의 사회문화적 격차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각 도시 교회 환경의 특수성이 이민자들이 자신의 종교생활을 구성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면, 각 지역의 정치적 상황 또한 도시에서 천주교 신앙을 유지하는 새로운 방식을 구성하는 역량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경찰의 압박이 심한 일부 도시에서는 보통 지역 관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지역 공동체(공식 및 비공식)로 들어가거나 독자적인 모임을 매우 소규모로 조심스럽게 유지하는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반면, 당국의 통제가 덜한 지역에서는 이주민 신자들은 기존 공식 혹은 비공식 교회와 독립적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개발하는 경향이 더 짙었다. 정치적 세력 또한 중국 천주교 안에서 내부적 차이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보여주는 여러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거대 도시 내에 이주민 천주교 신자들이 형성한 여러 개의 네트워크가 공존할 수 있다는 점도 살펴보아야 한다. 보통 이러한 네트워크는 민족 혹은 출신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이주민 신자들은 같은 지역이나 같은 활동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포들과 뭉친다. 이 네트워크의 역량과 자율성은 참여 신자의 수와 부유하고 인맥이 넓은 후원자가 있는가의 여부로 결정된다. 같은 대도시에 공존하는 다양한 네트워크들은 특히 사제를 고용하거나 현지 당국에 대응할 때 서로 힘을 합쳐 협력하기도 한다. 이주민 천주교 신자와 그들의 네트워킹 기술 결론적으로, 이주민 천주교 신자들을 통해 중국 천주교 또한 도시로 급격하게 이전되었다. 이주민 신자들의 존재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가 없고 대부분의 보고자료에서 집계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남아있지만, 이들은 여전히 현재 중국 교회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강점은 다음 세대로 천주교 유산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이주민 신자들끼리 서로를 돕는다는 것이다. 단, 이러한 네트워크는 민족, 지역 및 협동조합 노선을 따라 성장하기 때문에 비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새로 개종한 신자들은 천주교 신자 이주민과 결혼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주최하는 대규모 크리스마스 파티가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보여주더라도, 대부분의 이주민 신자들에게 외부를 향한 복음화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민 신자와 그들의 네트워킹 기술은 가난한 신자와 부유한 신자, 큰 성공을 거둔 후원자와 경험이 부족한 젊은 이주민, 도시 천주교 신자와 농촌 공동체 간에 효과적인 연대를 구성하면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이주민 신자들의 천주교 신앙은 가족 외부에서 신뢰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원천이 된다. 사실, 이주민 천주교 신자들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으면서 21세기 중국 교회의 적극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술과 자원을 갖추게 되었다. 여러 측면에서, 천주교 네트워크는 개신교의 원저우(溫州) 모델과 비교 대상이 된다. 원저우 출신 이주민들은 중국 전역과 해외에 주요 기독교 네트워크를 구축해왔다. 천주교 네트워크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 네트워크들은 개신교 후원자들의 지도하에 운영되고 서로 도울 것을 장려하며 공식 교회와 비공식 교회 간의 전통적인 이분법적 대립에는 맞지 않다.[3] 단, 원저우 교회들은 상업적인 측면에서 기업체를 유지하고 비기독교인 직장동료를 개종시키는 데 훨씬 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천주교 후원자들과는 달리, 원저우 출신 기독교인들은 네트워크 구성원의 자녀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신흥 도시 천주교 네트워크에서 봉사하는 천주교 사제들이 계약적 지위 안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이해하는지를 인지해야만 한다. 주교들은 이 사제들의 임명 과정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주민 신자들은 새로운 유형의 사목활동이 가능한 환경과 상당한 자금을 제공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들은 천주교 사제의 효과적인 지도력과 역할을 요구한다. 여러 측면에서 사제들의 역할은 암묵적으로 성사를 집행하는데 제한되어 있으며 이들의 사목적 역할을 지속적으로 협상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민 신자들이 만들어내는 창의적이고 유연하며 지역을 초월한 네트워크는 중국 교회의 전통적인 본당과 교구를 보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이 대도시에서 이들만의 길을 찾은 방식은 교회가 중국 도시에서 새로운 형태로 존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평신도와 서품된 사제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필자 소개 - 미셸 샴봉(Michel Chambon)은 프랑스 가톨릭 신학자이자 문화 인류학자로, 싱가포르대학교 아시아연구소(Asia Research Institute) 연구원이다.- 안토니오 스파다로(Antonio Spadaro, SJ)는 예수회 신부로 <치빌타 카톨리카>의 편집국장이다. [1] 해당 사안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려면 다음을 참조. S. 첸(Chen) – J. 파웰(Powell) (eds.), “변화하는 경제 상태의 사회 정책에 대한 중국의 고령화 영향(Aging in China Implications to Social Policy of a Changing Economic State)”, 뉴욕 (NY), 스프링거, 2012년.[2] 1990년대 중국 천주교에 대한 구체적인 배경은 다음을 참조. R. 매드슨(Madsen), “중국 천주교: 신흥 시민 사회의 비극과 희망(China’s Catholics: Tragedy and Hope in an Emerging Civil Society)”, 버클리(CA),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 1998년.[3] 원저우 개신교 공동체에 대한 소개는 다음을 참조. T. 메이나드(Meynard) – M. 샴봉(Chambon), “중국 천주교회의 현대화를 위한 방안(Ways for the Aggiornamento of the Chinese Catholic Church),” <치빌타 카톨리카>; 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을 참조. N. 카오(Cao), “보스 기독교인: 기독교 부흥의 ‘원저우 모델’에서 종교 사업,” <중국 저널(The China Journal)>, 59: 63–87; B. 풀톤 2015년: “중국 도시의 기독교인: 숨길 수 없는 빛(China’s Urban Christians: A Light That Cannot Be Hidden)”, 유진(OR), 피크위크 출판,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