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선 벨라뎃따(평화사도 1기 & 동화작가, 평화운동가) 사진 1 마므레 상수리나무에서 세 천사를 대접하다 Ⓒ 지거 쾨더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제가 빵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창세기 18, 1-8) 아브라함처럼 나그네가 주님임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그런 능력이 없는 나는 모든 사람을 환대해야 하나.... 환대(歡待)의 사전적 의미는 ‘반갑게 맞아 후하게 대접함.’ 이니, 버거움이 앞선다. 아마도 환대하기보다는 환대받기를 더 좋아하는 내 습성 때문인 것 같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식사(폴란드, 1966) Ⓒ 로무알드 브로니아레크 / Forum 폴란드인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올지도 모를 손님을 위해 빈 의자와 빈 접시를 준비하는 전통이 있다.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즉시 음식을 대접하고 편히 쉬도록 하기 위해서다. 손님이 그 누구이든 하느님이라 여기며 극진히 환대한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3, 2)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남북의 고아 1,500여 명이 비밀리에 소련(현 러시아)으로 보내졌다. 아이들은 소련에 위탁 양육되었으나 방치되었고, 영양 상태나 건강이 악화된 채 폴란드로 재이송되었다. 이 아이들이 머문 곳이 프와코비체 양육원이었다. 정신병원으로 사용되었던 프와코비체 양육원은 아이들을 돌보기에 최상의 비밀 장소였다. 양육원의 선생님과 의사, 요리사들은 아이들을 극진히 보살폈다. 부모와 가족을 잃은 아이들에게 눈을 맞추고, 따뜻한 웃음과 부드러운 말로 사랑을 베풀었다. 전쟁의 상처로 아픔을 겪었던 아이들이 선생님을 ‘마마’, ‘파파’라 부르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폴란드 사람들은 기꺼이 아이들의 엄마와 아빠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8년의 시간이 지났다. 1959년,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송환 명령을 받고 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여기서 엄마와 살고 싶어요. 돌아가기 싫어요.” 선생님과 정이 든 아이들은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 선생님들 역시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이미지 이 이야기는 추상미 감독(배우)에 의해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그 당시 아이들을 돌봤던 젊은 선생님과 요리사는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그들은 7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건만 북으로 간 아이들을 잊지 못해 빈 의자와 빈 접시를 마련해 놓았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백발노인이 눈물을 글썽였다. 눈물은 진심이었다. 추상미 감독은 ‘상처가 사랑이 되었다.’고 말했다. 상처(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독일의 식민지 지배) 입었던 사람들이 상처 입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치유해 주었다. 환대에는 물질적 나눔도 필요하지만 진실한 마음 나눔이 더 중요했다. 지금 폴란드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였다. 전쟁으로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고단한 나그네를 기꺼이 받아들여 준 것이다. 우리의 전쟁고아들을 환대했듯이,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고단한 삶을 토닥여 주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도 난민을 받느냐 마느냐로 몹시 시끄러웠다. 돈이 있다고 선뜻 빈 의자를 내어놓는 건 아닌듯싶다. 자신이나 제3자가 위험에 처하지 않는데도 고의로 구조하지 않는 구조불이행(Failure to Rescue)을 처벌하는 법규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Good Samaritan Law)이라 부른다. 구조거부죄 혹은 불구조죄라고도 부른다. 프랑스, 독일, 핀란드, 폴란드, 스위스, 러시아, 중국 등 많은 나라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실행하고 있다. 구조불이행 시 프랑스에서는 징역 5년 이하, 폴란드에서는 징역 3년 이하의 형을 받는다. 아직 우리나라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세상은 발전되어 편리해졌고 풍요로워졌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은 더 멀어진 듯하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까지 만들어 놓을 걸 보면 말이다. 씁쓸하지만 희망한다. 빈 의자를 준비하고 빈 접시를 차려놓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아메리카 원주민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말했다.“얘야, 우리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파란 늑대는 남을 돕고 옳은 일을 하고, 검은 늑대는 나쁜 일을 하고 남을 해치지.”“그럼,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빙그레 웃던 할아버지가 대답했다.“얘야, 네가 먹이를 주는 쪽 늑대가 이긴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