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희 아녜스(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미래세대연구자모임 샬롬회 회원) 설명 2020년 2월 중순 아직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지 않고 있던 때, 회사 동료들은 그날 저녁 회식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지난번에 갔던 양꼬치집이 어떠냐는 한 동료의 말에 다른 동료가 “싫어요. 거기 중국 사람이 주방에서 일하는 곳이잖아요.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거기에 가서 밥을 먹어요.”라고 답한다. 종전까지 유럽으로 놀러 갈 생각에 들떠 있으면서, 유럽에서의 동양인을 향한 혐오적인 시선에 혀를 끌끌 차던 그였다. 비단, 이 이야기가 그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하철에서 중국인의 통화 소리가 들리자, 그 칸에 타고 있던 사람 중 몇몇이 그를 향해 시선을 쏘았다. 자신을 둘러싼 무거운 침묵에 억눌린 그가 성급히 전화를 끊고 지하철에서 내린다. 그가 느낀 감정은 공포였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위기에 직면하여 몸살을 앓고 있는 한편, 위기는 사회에 잠식되어 있던 편견과 차별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모두가 안전을 말하고 있는 이때, 어떤 이들은 역설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혐오표현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표현의 자유라고 수긍하기에는 이로 인해 불거지는 사회적 해악이 문제이다. 혐오표현의 해악은 한 주류 집단의 구성원들이 소수 집단의 구성원들을 향해 동등한 시민권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취지로 내보이는 혐오표현의 공표로 일어난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정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믿음이 파괴된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혐오표현 금지법이 제정되면 ‘이곳은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이다’라는 상징적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혐오표현 규제를 주장할 때 등장하는 첫 번째 반론은 표현의 자유와 상충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소수자와 그 가족들의 존엄과 사회적 권위의 실추를 감수하면서까지 혐오표현을 표현의 자유로 인정해줄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혐오표현을 규제한다면, 혐오표현의 해악과 표현의 자유 중 어느 쪽에 더욱 영구적이며 지울 수 없는 형태의 상처를 남기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혐오표현의 표적이 된 사람들에게는 혐오표현들로 오염된 사회적 환경에서 자신의 자녀들을 안전하게 양육할 수 있느냐와 결부되는 삶의 문제이지만, 혐오 발화 행위자에게는 자기표현의 자율성이 훼손당하는 문제이다. 아래에서는 혐오표현 규제 반대의 논거로 사용되는 에드윈 베이커의 자율성 논거와 이에 대한 저자의 반론을 살펴보자. 에드윈 베이커는 자기표현이 순수한 자기 드러내기를 목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혐오표현도 자기표현 중 하나인 셈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는 다르게 어떤 발화 행위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좌절시키려는 목적으로 고안되었을 수 있다. 베이커 역시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발화 행위 역시 물리적 폭력과 구분되며, 발화는 청중으로 하여금 정신적 작용을 하게 하는 매개일 뿐 발화 자체가 결과로서 해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혐오 발언 자체가 직접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발화 행위를 받아들이는 군중의 자율적 응답이 행동으로 표출됐다는 것이다. 베이커에 따르면 법은 바로 그 지점, 혐오표현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개입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혐오 발언으로 청중이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를 떠나 혐오 발언 자체는 공공선의 약화와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공공선 약속 파기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혐오표현의 메시지는 이미 소수자들이 적대적인 환경 앞에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며,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렵게 한다. 이렇듯 혐오표현의 해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청중의 정신적 과정이 아니라, 발화 행위 단계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혐오표현의 해악은 정신적 매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베이커의 주장은 이미 초래된 해악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며, ‘혐오표현이 해악이 될 수 없다’는 말에 설득력 있는 답이 되지 못한다. 2021년 3월 21일(현지 시각)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벌어진 시위. 시위 참가자들은 아시아계 미국인과 태평양 섬 주민들에 대한 인종차별주의를 멈추라고 주장했다. Ⓒ 연합뉴스 이 책의 의도는 혐오표현 금지법 제정 차원을 넘어서 혐오표현이 없는 사회적 환경을 구성해야 한다는 데 있다. 모든 이들은 ‘이 세상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타인들과 함께 평화로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공적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저자가 말한 질서정연한 사회의 모습이다. 질서정연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침에 집을 떠날 때 차별받거나 모욕과 테러를 당하지 않고, 모든 폭력, 배제, 모욕, 종속으로부터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사회에 은밀하게 깔려있던 편견과 차별이 드러난다. 기울어진 세상이 위기에 취약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코로나19는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지만, 공적 확신이 없는 세계는 다시금 위험해지고 말 것이다. 법은 변화를 만들지 않는다. 변화는 사람이 만든다. 이제 공적 확신과 질서정연한 사회에 위배되는 생각을 인지하고 바로 잡는 것이 위기 극복을 위해 해야 할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