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희 베드로 신부(의정부교구 7지구장) 세상은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급격하게 변해 갑니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가 아닌 좋지 않은 쪽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기후’입니다. 현 시대는 ‘기후 위기’라는 절대절명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위협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특히 최근 들어 기후 위기의 현상을 부쩍 우리는 몸으로 직접 느끼게 됩니다. 이 위기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많은 시민단체들, 그리고 이름 모를 한 개개인의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행동에 나선 모습을 자주 보곤 합니다. 그 피켓 중에 시선을 끄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기후는 변하는데 우리는 안 변하나요?” 이제 우리 모두가 변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편의와 이익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존과 평화를 위해 우리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창조물과 평화를 광범위한 환경 파괴는 모든 피조물과 인간의 평화를 저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30여 년 전 이미 기후 위기가 평화를 위협할 수 있음을 인지하였고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생태적인 자각이 필요함을 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태의 위기가 바로 도덕과 윤리적 삶의 문제에서 비롯됨을 지적하며 ‘생명 존중’이나 ‘창조 보전’을 무시한다면 평화로운 사회를 이룰 수 없음을 평화의 날 담화문에서 강조하였습니다. “지구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공동 유산입니다. 이 유산의 결실들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탐욕과 이기심은 창조 질서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창조 질서는 상호 의존을 특징으로 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1990.01.01. 제23차 담화). 윤리적 삶의 문제인 이 생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을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대로 ‘공동의 집’인 이 지구를 우리의 공동의 유산으로 후대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는 창조 질서의 회복이 꼭 필요합니다. 또 다른 환경 파괴의 주범 중 하나는 ‘전쟁’입니다. “오늘날 어떤 형태든 지구적 규모의 전쟁은 가늠할 수 없는 생태적 손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인간 생명과 사회 구조를 파괴할 뿐 아니라 대지를 황폐화시키고 곡물과 초목을 절멸시키며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킬 것입니다”(제23차 담화).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이 전쟁으로 인해 그 지역은 사람과 동물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심각히 파괴되었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생태 위기에 있어 우리 모두는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공동 책임의 의식과 함께 행동하고 해결하려는 공동의 합의가 이루어질 때 평화를 위한 노력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생태 위기는 이렇게 사회 내부의 평화 추구라는 한층 더 폭넓은 맥락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구와 지구의 대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지니는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제23차 담화). 교황님은 1979년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생태를 증진하는 사람들의 천상 수호자’로 선정하였습니다. 성인이 삶으로 보여준 창조 보전의 모범을 우리도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평화를 이룰 때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 평화를 이루는데 우리 자신을 더 잘 봉헌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평화가 모든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제23차 담화). 평화를 원한다면, 양심을 존중해 주십시오 환경과 평화, 두 가지 모두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가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환경과 평화는 인간이 마음 먹기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의 자유와 개방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환경과 평화는 인간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데 필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교황님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먼저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법을 새겨 주셨습니다. 바로 양심이고, 우리는 이 법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입니다”(1991.01.01. 제24차 담화). 우리가 진리에 근거하는 양심에 귀 기울여 판단하고 행동할 때 평화는 개인이 아닌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줄 것입니다. 교황님은 평화를 위협하는 심각한 위협 중의 하나를 ‘불관용’의 태도에서 찾습니다.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은 불관용 탓에 제기되는데, 이 위협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불관용은 잔혹 행위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 잔혹 행위가 가장 고통스러운 역사의 교훈 가운데 하나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제24차 담화). 불관용의 태도는 개인과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결국 평화로운 공존을 이룰 수 없게 합니다. 우리가 양심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불관용이 아닌 ‘관용과 화해’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바로 이해했다면 양심의 자유는 바로 그 본성상 언제나 진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양심의 자유는 불관용이 아니라 관용과 화해로 이어집니다. 이 관용은 수동적 덕행이 아닙니다. 이 관용은 능동적 사랑에 뿌리를 두고 모든 이를 위한 자유와 평화를 보장하는 데 적극적으로 투신하는 태도로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제24차 담화). 그러므로 양심을 지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불관용이 아닌 ‘관용과 화해’로 평화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평화는 왜곡되지 않고, 평화는 편협하지 않으며, 평화는 모든 이를 품어 주는 큰 마음, 즉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양심을 존중하면서 함께 진리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하느님 뜻과 일치하여, 평화에 이르는 자유의 경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제24차 담화).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이 ‘공동의 집’을 창조 보전과 평화의 공간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작은 실천과 생태적 회개를 위한 작은 몸짓은 다른 것이 아님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