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스트롱(David Strong), SJ / 발행일 : 2018년 7월 16일 2022년 「평화의 길」 특별 기획으로 이웃 국가 중국의 ‘천주교회’의 역사와 오늘날의 모습, 그리고 바티칸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관련 칼럼을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글의 영역본은 예수회 교양지 「치빌타 카톨리카」(La Civiltà Cattolica)의 <교회 생활Church Life> 코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링크 : https://www.laciviltacattolica.com/the-jesuits-in-china-1842-to-1954/ 미켈레 루지에리(Michele Ruggieri)와 마태오 리치(Matteo Ricci)는 1582년 처음으로 중국에 입국이 허가된 예수회원이다. 예수회의 첫 번째 활동 기간은 영광스러운 순간들과 박해의 기간을 거쳐 1773년 예수회가 탄압을 받으면서 끝났다. 재건(1814)을 거쳐 중국에 다시 등장한 예수회는 1842년부터 중국에서 추방된 1954년까지 활동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1950년대까지 중국 중부 지앙난(江南)에 파견된 1,121명의 해외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은 286명의 중국 예수회원과 소수의 중국 교구사제, 다수의 남녀 평신도 교리교사들과 협력하였다. 이들이 파견된 기간은 중국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격동의 변화가 일어난 한 세기였으며, 예수회는 중국인의 전통적 그리고 현재 생활 방식을 이해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1] 첫 번째 선교단은 프랑스의 예수회 관구에서 파견되었으며, 그 이후 지앙난 지역의 선교단들은 샹파뉴(프랑스), 레온 및 카스티야(스페인), 프랑스계 캐나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및 캘리포니아 관구들에서 선교사들을 데려와 별도의 대리구들을 세웠다.[2] 이 시기 예수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주요 자료에는 선교사들이 중국 문화를 관찰한 바와 일반인 및 정부 관료와의 만남을 보고하며 고국으로 보낸 서한, 일기, 보고서, 성찰과 많은 통계자료 등이 있다. 선교사들이 제시한 다양한 의견을 통해 사회, 정치, 교회 상황에 대한 유럽 출신 선교사들과 중국인 선교사들의 대조적인 반응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또한 내외부적으로 선교사들이 직면한 행정적 문제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면, 로마의 지시와 다른 지역 선교사의 의견 사이에 존재했던 긴장, 선교사들과 다양한 중국 정부 기관과의 협상에 대한 부분도 찾아볼 수 있다. 기존의 유럽 종교 경험의 틀 내에서 선교사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때로는 정체성에 변화를 주도록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선교사들은 많은 서한을 통해 그들 예수회의 이념과 그 이념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이 자료들을 통해 예수회가 그들의 전통적인 유럽의 종교적 관념에 대한 애착과 변화하는 사회, 종교, 문화적 환경에서 이들이 매일 중국에서 겪는 삶의 현실 사이에서 경험한 모순과 긴장을 해결하려고 시도한 방법을 살펴볼 수 있다. 지정된 라틴어나 불어에 능통한 중국인들의 의견을 일부 포함한 중국 예수회의 서한과 보고서가 특히 유용한 자료인데, 이들 중국인들은 대개 유럽 선교사들의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외무부의 기록 보관소는 프랑스 정부와 천주교 선교단 사이의 긴밀한 협력을 자세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 출처이다. 선교 활동에 대한 프랑스 보교권의 영향은 중요한 주제이다. 바티칸 기록 보관소와 인류복음화성 기록 보관소는 선교 활동에 대한 천주교 관료들의 반응에 대한 추가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살펴보면, 중국 생활이나 선교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로마나 본국으로 보낸 모든 서한들은 작성자가 자체적으로 내용을 상당히 검열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서한들은 성과와 어려움, 특히 재정적인 어려움과 반복되는 인력 부족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 중국 문화 혹은 정치적 상황에 대해 관찰한 바는 서한 작성자의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고, 선교사마다 인식하는 바가 다른 경우가 자주 있었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는 개인적인 내용이 더 많이 들어있었다. 또한 관구 정기 간행물에 기고하기 위해 출신 관구로 보낸 편지들은 그간 이루어낸 성과에 대한 정보도 제공했지만 여전히 추가 지원이 필요한 문제들, 보통 재정적인 어려움을 지적했다. 평신도 동료 선교사들의 지원은 중요한 생명줄이었다. 양날의 검, 보교권 예수회는 중국인과 교류하며 그들의 경험과 생각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새로운 문화적 경험에 개방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에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이는 예수회가 자연재해, 전쟁, 사회 혼란, 반대와 박해 속에서도 계속 열정적으로 선교 사업을 수행해나간 방식을 보여준다. 예수회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계속해서 그들의 접근 방식을 바꿔나가야만 했다. 끊임없는 적응은 쉽지 않았는데,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들이 때로는 유럽인의 사고 및 행동 방식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 사람들은 공산당과 천주교회라는 두 주체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것은 선교 사업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방해가 되기도 했다. 보교권은 중국 관료들이 선교사들을 반대했을 때 지원과 심지어 무력을 제공함으로써 선교사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왔다. 중국인 개종자들은 박해를 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유럽 열강들에게 그들을 대신해 행동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교권의 이러한 지원은 개종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인이 되면 중국 빈곤층은 많은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홍수와 가뭄이 닥쳤을 때 교육과 구호물자를 지원 받을 수 있었다. 유럽 열강의 존재와 영향력은 궁극적으로 중국에 이익이 되었다. 개혁을 추종하는 많은 중국인들에게 조국을 변화시켜 중국을 점령한 유럽 국가들과 동등한 힘을 가진 현대 국가로 거듭나도록 투쟁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회가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인들에게 선교사들은 유럽의 중국 침략과 착취의 일부이며, 선교사들도 이들과 한패라는 점을 시사했다. 외국인들이 중국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게 되었고,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박해와 죽음을 겪었는데, 이는 선교 사업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럽인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대부분의 중국인은 종교와 관련이 있든 없든 유럽의 통제 없이 중국인들 스스로 국가를 운영하기를 원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빛과 그림자 선교사들은 각 선교 사업의 성장에 관한 상세한 통계를 발표함으로써 끊임없이 선교사 자신들과 로마의 장상들, 그리고 그들의 선교 사업 후원자들을 안심시켰다. 새로운 관할지의 시작, 개종자 수의 증가, 선교 기관, 특히 교회와 학교, 고아원, 의료기관의 설립, 새로운 그리스도교인의 종교적 열정 등이 공유 대상이었다. 비극과 좌절에 대한 소식은 선교사들이 모든 어려움을 때로는 하느님의 도움만으로 극복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제시되었다. ‘고국’의 영적, 재정적 지원은 선교 사업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새로 도착한 선교사들에게 중국어 공부는 또 다른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때로는 몇 년씩 걸리기도 하였고 다양한 방언 또한 장애물이었다. 많은 선교사들의 지적 능력은 중국어를 통달하기에는 부족하였고, 이는 선교의 효율성을 저해하였다. 이 때문에 공동체에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평신도 교리교사들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교육 기관에서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대두되면서 이는 지속적인 화두가 되었다. 프랑스어가 주요 언어로 채택되었지만, 좀 더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중국어가 더 널리 사용되기를 원했다. 중국이 유럽 문화와 상업에 개방되면서 영어 교육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텐진의 프랑스 예수회는 이러한 추세를 소속 기관을 통해 재빨리 받아들였지만, 상하이 프랑스 예수회는 수십 년 동안 버텼다. 그러나 프랑스 인력이 감소하고 다른 예수회 관구에서 특히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선교사를 지원받아야 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협상을 통해 캘리포니아 관구로부터 미국 예수회원들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이 중국을 떠날 때 대부분의 중국 선교사들은 투옥되었지만, 많은 중국 천주교 신자들의 중요한 유산은 남아 있었다. 1950년대부터, 신앙을 지킨 개종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1978년부터 덩샤오핑(Deng Xiaoping) 치하에서 재건된 천주교회의 핵심이 되었다. 마오쩌둥(Mao Zedong)의 공식적인 종교 탄압과 뒤이은 그리스도인 박해도 유럽 선교사들의 유산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중국인 사제와 수도자들은 천주교 가정이 신앙을 유지하도록 지원했다. 유럽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은 토착 중국 교회의 생존 덕분에 결실을 맺었다. 1949년 이후 교회의 공식 공동체와 지하교회 공동체를 이끌어나간 주체는 서방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은 사제와 주교였다. 생존을 위해서는 정부의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고 있는 중국인 주교와 사제들에게 교육을 받는 과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교육을 잘 받고 매우 열성적인 유럽 사제들을 완전히 이질적인 중국 문화에 편입시키는 것은 프랑스 예수회에게 특별한 도전이었다. 외국 세력의 지원을 받아 중국에 들어가는 것은 수월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선교사들은 외세의 영향력에서 최대한 독립적으로 중국인과 교류해야 했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메시지가 전적으로 영성에 관한 것이며 중국에 있는 유럽인들의 세속적 혹은 정치적 야망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예수회는 항상 프랑스 보교권의 힘과 지원에 의존했기 때문에, 이 주장이 중국인들에게 항상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회는 그들의 프랑스 유산에서 벗어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선교사이기 전에 프랑스인이었다. 선교사들에게 프랑스 민족주의가 중요했던 만큼, 이들은 중국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중국인들과 교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중국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고, 유럽 문화 범주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 문화와 관습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에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것들에는 모두 변화를 요구했다. 프랑스 예수회가 상하이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다른 나라의 예수회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프랑스의 선교 방식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여기에는 특히 때때로 오만하고 위선적으로 보이는 프랑스 예수회의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선교 방식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에서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이러한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예수회는 중국에서 천주교회를 설립하고 확장하는 데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이는 그리스도교인의 수와 그리스도교 공동체 수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증명되었다. 외국인들이 추방당했을 때, 이들은 강력한 지하교회를 남겼고 이는 결국 진정한 중국 교회로 번성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선교사들 1842년 프랑스 관구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난징 교구에 합류했다. 1856년 난징 교구는 프랑스 관구에 위임된 난징 대목구와 베이징 교구의 관할에 속하며 샹파뉴 관구 출신 프랑스 예수회 수사로 구성된 남동 직예直隶(献县) 사도 대목구로 나뉘었다. 그리고 다른 유럽국가와 미국 관구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에 의해 이 대목구들은 추가로 나뉘게 되었다. 1956년 셴셴 선교 100주년을 맞아, 그간 100년 동안의 성과와 손실에 대한 감동적인 증언이 있었다. 샹파뉴 관구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의 매우 헌신적인 봉사에 대한 증언이었다. 사망자 수, 중앙 거주지, 신학교, 대학, 수녀들의 활동, 초등학교, 베이징의 교구 학교, 베이징의 세 곳의 거주지, 인쇄 사도직, 약국 및 병원에 대한 내용이었다. 100년이 걸려서 완수된 이 모든 성과는 짧은 시간에 모두 무너졌다. 상하이 교구 알로이시오 진 루시앤(Aloysius Jin Luxian 金魯賢, SJ, 예수회, 1916~2013) 주교는 상파뉴 관구 예수회가 프랑스 관구 예수회보다 “더 개방적이고 비전이 있다.”고 생각했다. 상파뉴 관구 출신 예수회는 현지 문화에 맞춰 현지 교회 사제를 양성하고 중국인 주도의 교구를 설립하라는 교황의 요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다양한 국가의 예수회가 중국에 들어옴에 따라 초기 프랑스 선교 방식과 더 많은 차이점이 두드러졌다. 샹파뉴 관구 예수회와 마찬가지로, 우후(芜湖)에 자리잡은 스페인 예수회는 중국 교회에 다가가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고, 이탈리아 예수회는 중국인들에게 더 우호적이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중국의 종교적, 사회적 관습에 프랑스 선교사들보다 더 잘 적응하였고 심지어는 초기 리치(Ricci) 시대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모방하려고 시도했다. 이는 프랑스계 캐나다 예수회도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 예수회는 외부인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중국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캘리포니아 출신 미국 예수회 선교사의 대부분은 상하이에 있는 학교에서 중국인들에게 서양 교육을 전수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이 직무의 상당 부분은 중국인을 대상으로 했다기보다는 현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선교사들의 생활 방식은 여전히 미국식이었고, 대부분의 미국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어를 배우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들은 여전히 외부인으로 남아있었다. 그중 예외적인 인물은 좀 더 예외적인 예수회 선교사 중 하나였던 찰스 시몬스(Charles Simons) 신부였다고 할 수 있다. 시몬스 신부는 전통적인 예수회 기관보다는 농촌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평가 및 전망 예수회의 선교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주교 선교학의 역사라는 맥락 안에서 천주교 선교 사업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하고 천주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지옥에서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지 않은 모든 이들을 칭하는) ‘이교도’의 개종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믿음의 힘은 로마 교회가 공표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지식을 이교도들에게 전수할 용기를 주었다. 모든 천주교 신자들이 받은 가르침과 같이 선교사들도 천주교회가 진리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교리가 부족하고 심지어 이단적이어서 로마 천주교로 개종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에서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분열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끊임없는 놀라움의 원천이 되었다. 선교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지 토착 교회를 설립할 필요성이었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새로이 상하이에 도착한 예수회는 1843년 신학교를 세웠다.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은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제공된 교육 과정은 유럽의 교회 교과 과정이 당혹스럽게 느껴졌을 중국인들에 대한 교육 효과에 대한 성찰 없이 로마 교회 당국에서 세세히 규정한 대로 진행되었다. 라틴어로 읽고, 말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사항은 중국인 학생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개종이 진행되면서 예수회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웠다. 공동체 내에서 신생 신자들은 주변 비 그리스도교 문화의 해로운 영향에서 분리되어 서로를 도왔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공동체를 강화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이 다른 이들이 따라야 할 좋은 본보기가 되어 비 그리스도교인들이 ‘우월한’ 삶의 방식을 따르도록 영향을 미치기를 바랐다. 그리스도교는 사람들에게 더 고차원적인 삶의 의미를 제시하고 물질주의와 미신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지향했다.중국인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데는 영적 가르침 외에도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많은 이들이 가뭄, 기근, 도적들의 공격을 받은 기간 동안 선교사들이 베푼 도움을 감사히 받았다. 선교사들은 미래 현지 교회의 초석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우면서 보편교회의 사명을 전파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가르침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상황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대체로 유럽식 교육 모델을 강요했다. 로마는 초기에 발리냐노(Valignano)와 리치(Ricci)가 채택한 선교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전례를 약간 수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매우 드물었다. 대부분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럽의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전달하는 것이 최선의 방식이라 믿었다. 이들은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하였고 로마를 따라야만 했다. 중국에서 미래 선교 사업의 모델은 17세기와 18세기에 리치(Ricci)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이 시행한 모델을 따르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리치와 동료 선교사들은 수용과 적응을 바탕으로 한 모델을 시행하였고,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다양한 문화에 적응하는 한편, 유럽 관점에서의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건강한 방식의 문화 혼합을 통해 유럽인들은 중국의 풍부한 유교 문화 유산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중국은 특히 과학과 종교 분야에서 유럽의 통찰력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초기 선교 단계에서 유럽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손님으로서 상호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새로운 유형의 선교사업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 중국인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 문화와 유럽 문화는 함께 할 때 더욱 풍부한 지식과 덕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진리와 덕의 개념을 표현할 때 양측은 서로 다른 경험을 교환할 수 있었다. 오늘날 중국을 대할 때, 모든 관계는 반드시 상호 도움이 되는 동반자 관계이어야 한다. 티에리 메이나르(Thierry Meynard, 예수회)는 예수회를 비롯한 외국 선교사들이 예수회의 이상인 “타인을 위한 형제자매”가 되기 전에, “타인과 함께하는 형제자매”가 되어야 한다고 통찰력 깊은 제안을 한다. 오늘날 현지 교회의 의사결정에 대한 자율권이 증대되면서 이는 로마와 중국 교회 사이의 유익한 상호 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보편교회와 현지 교회는 그들의 공동체에서 성령을 인식하는 방식을 공유함으로써 서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중국 교회는 이 과정의 발전으로 분명히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많으며, 천주교회가 ‘중국의 특징’을 존중한다는 신호를 중국 정부에 보낼 수 있다. 현 중국 공산당 정부는 서구 그리스도교가 근대역사에서 유럽의 침략과 결탁하여 중국의 정서와 민족주의에 대한 존중을 훼손하며 중국에 진출한 것으로 의심해왔다. 앞으로 그리스도교와 중국 정부 사이의 모든 교류는 종교와 세속 간의 각각의 영역권이 분리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며, 두 영역 모두 개별적으로 인류 발전에 중요한 사회적 기여를 하지만 때로는 두 영역이 통합될 때 더욱 조화롭고 공정한 사회가 구현될 수 있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2015년 중국 천주교 관련 통계에 따르면, 중국에는 112명의 주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 99명이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 공식 교회 공동체에 소속된 주교는 70명으로 2014년보다 11명 늘어난 수치이다. 지하 공동체의 경우, 2014년보다 13명 줄어 29명의 주교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개방 교회에는 2,500명의 사제와 3,170명의 수녀가 활동하고 있으며 이는 2014년보다 줄어든 수치이다. 공식 교회는 9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신학생 숫자는 2014년 560명에서 2015년 424명으로 줄었다. 지하교회 또한 10개의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신학생의 수는 300명에서 200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소신학교는 11개에서 20개로 늘었다. 이러한 통계 자료는 중국 교회가 건강하지만, 중국 당국의 지침을 따르면서도 중국인들에게 영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균형을 유지하기 때문에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국 교회의 중요한 과제는 공식 교회 공동체와 지하교회 공동체 사이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분별력, 개방성,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미래에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천주교회가 영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의 영적 갈망에 부합할 수 있도록 적절한 자유와 독립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 교회는 마침내 어떠한 외세와도 연결되지 않고 보편교회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소개 - 데이비드 스트롱(David Strong)은 예수회 신부로, 호주 핌블의 카니시우스 센터(the Canisius Center in Pymble)의 역사학자이다. [1]. “선교의 사명: 중국의 예수회, 1842-1954 (A Call to Mission: the Jesuits in China, 1842–1954), (ATF Press, 2018)” 두 권에 대한 연구 및 저술은 특히 중국 전례 논쟁과 관련한 나의 17세기와 18세기 중국 역사 및 예수회 선교사에 대한 이전 연구와 맥락을 같이 한다. 나는 1842년 지앙난의 첫 선교 사업을 시작으로 겨우 9명의 선교사만 남게 된 1950년대까지 해당 지역의 모든 선교 사업을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 문화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유럽의 대조적인 해석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두 권의 간행물은 다양한 국적의 서구 선교사들이 채택한 상이한 접근 방식을 보여주는데, 중국에 파견된 서구 선교사들이 같은 신학적, 교회적 배경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접근 방식이 아닌 다른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본 글에서 인용된 모든 데이터는 상기 언급된 두 권의 책에서 가져왔다. [2]. 9개 선교부의 역사를 조사하기 위해 로마에 위치한 예수회 본부 기록보관소와 다른 관구에 있는 기록 보관소를 방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