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원(북한대학교대학원 박사 수료) 추석이라 오랜만에 가족들과 한 밥상에 둘러앉았다. 각자 사는 곳이라 봤자 서울과 경기권이지만, 다 같이 밥 먹는 기회를 갖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갖가지 음식을 하나씩만 맛봐도 배부를 정도로 엄마의 정성이 듬뿍 담긴 추석 음식의 종류는 다양했다. 명절 음식의 수고를 염려해 만류했으나 엄마는 분위기를 내신다며 기어이 각종 요리를 손수 만드셨다. 명절 음식의 대표 메뉴인 떡과 갈비찜, 잡채, 전, 그리고 느끼함을 잡아줄 겉절이와 고들빼기 무침 등 맛과 건강 모두를 고려한 메뉴가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졌다. 살쪄서 큰일 났다는 실없는 내 얘기에 엄마는 “살이 쪄야 예쁘다.”고 응대하셨다. 밥은 안 먹어도 된다고 했으나 엄마는 연자육(연꽃의 씨)과 찹쌀을 넣어 만든 밥이라며 한 숟가락이라도 맛보라셨다. 한술 떠서 맛본 밥은 의외로 맛있었다. 고슬고슬한 연자육의 식감도 좋았으나 아무래도 찹쌀의 찰지고 고소한 맛이 밥맛을 살린 것 같았다. “어 이거 맛있는데? 농촌지원 가서 먹은 찰밥만큼 맛있잖아!”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북한에서 농촌지원 경험을 해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의 이야기 주제는 농촌지원으로 바뀌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농촌지원은 말 그대로 농촌을 돕는 일이다. 북한에서 고급중학교 1학년생(남한의 고등학교 1학년) 이상의 모든 성인은 5월과 10월이면 농촌지원을 가야 한다. 그것도 최소 20일에서 많게는 40일 정도의 긴 시간이다. 4월과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는데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개강하고 한 달 정도 수업을 듣고 나면 다시 한 달을 농촌지원에 동원되었다가 학교로 복귀하자마자 곧 중간고사를 맞이하게 된다. 각 학교에 할당된 국영농장으로 농촌지원을 가면 학생들은 다시 2~3명으로 나뉘어 농장원(농민)의 개인 주택에 배정되어 숙박한다. 식사는 학급 단위로 하고 장소 또한 농장원의 집 하나를 정해 사용한다. 한 명 또는 두 명이 ‘식당근무’로 지명되고 나면 이들은 한 달 내내 학급 학생들의 세끼를 보장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땡볕 아래 농장일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서(?)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식당근무로 뽑아달라고 담임에게 로비를 하기도 한다. 다만, 식당일도 나름 경험이 필요하고 책임감도 요구되는 자리인지라 다양한 능력을 고려하여 교원(교사)이 식당근무 대상자를 정해준다. Ⓒ노동신문·뉴스1 그나마 10월에 가는 농촌지원은 봄철 농촌지원보다 나름 낭만적(?)이었다. 일명 추수동원이라 불리는 가을 농촌지원은 현지에서 직접 햇곡식과 과일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마다 주인집(숙박 배정을 받은 농장원의 개인 주택)의 마당에서 빨갛게 익어 떨어진 감을 주어 먹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갓 수확한 벼를 탈곡하여 지은 햅쌀밥은 정말 맛있었다. 어느 주말 점심 햇찹쌀로만 지은 밥을 주었는데 정말 꿀맛이었다. 어쩌면 한창 먹을 나이에 한 공기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적은 양 때문에 더 맛있게 느껴졌을 수도 있으나 어쨌든 가을 농촌지원은 그때 먹었던 찰밥과 비슷한 맛으로 내 기억에 저장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가을 농촌지원에 가지 않았다. 정확히 얘기하면 가을 농촌지원은 없어졌다. 이유는 수확기에 알곡 유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수확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되는 사람들도 못 믿을 만큼 식량 사정이 열악해졌다.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농장 곡식을 빼돌리고 훔치는 일이 빈번해지자 농장원들이 당직 근무처럼 순번제로 곡식을 지키던 일도 안전원(남한의 경찰)이 무장을 하고 순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가을이 되면 농장에서 군인들과 군용 트럭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군량미 계획분을 확보하기 위해 후방부 소속 군관(보급부대 장교)들이 직접 현지에 나오기 때문이다. 원래 군량미는 농장에서 가장 먼저 달성해야 하는 계획이다. 그러나 국가가 비료와 농기계 사용에 필요한 기름 등을 보장해주지 못하다 보니 군량미 계획을 미달하는 농장이 많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군인들이 직접 농장 현지에서 군량미를 조달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고난의 행군이 절정이던 1990년대 후반에는 군량미를 실어가는 군인들과 한 해 분배(농장원들이 1년간 일한 만큼 곡식으로 보상받는 제도)도 제대로 받지 못한 농장원들 사이에 팽팽한 대치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군량미 보장을 방해하는 것은 ‘반역죄’로 취급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농장은 곡식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장한 안전원들이 가을 곡식을 지키고, 군인들이 군량미를 가져간 다음 다시 농장 간부들이 각종 명목으로 먼저 챙기고 나면 농민들에게 차례지는 몫은 한 해를 살아내기에 너무나 부족한 양이다. 농민들이 열심히 일할 의욕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다고 농장원을 그만두고 직업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다. 당국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수확이 끝난 논밭에서 주변 농장원들이 이삭 줍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이삭줍기”가 19세기 프랑스 극빈층의 삶을 보여준다지만 21세기 북한의 농촌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추석은 오랜만에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넉넉한 음식과 마음을 나누는 날이다. 그러나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북한의 수많은 어머니들에게는 걱정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쓸쓸한 날이기도 하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다. 수고로이 명절 음식을 한 상 가득 만드신 나의 어머니도 어쩌면 예전의 아쉬움을 봉창하고 싶은 마음이셨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