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선 벨라뎃따(평화사도 1기 & 동화작가, 평화운동가) 운 좋게 작가들에게 주어지는 해외 레지던스에 뽑혔다. 몇 년 전 폴란드 해외 레지던스에 지원했다가 미역국을 먹은 터라 고마움이 배가 되었다. 폴란드를 지원하면서 기획서에다 홀로코스트 둘러보기와 한국전쟁 당시 폴란드로 보내졌던 고아들이 살았던 양육원 답사를 포함시켰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한 후 오랜만에 시차 적응이란 걸 한 후 집을 나섰다. 바르샤바에서 4시간을 달려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제노사이드(대량 학살)를 공부해온 터라 오슈비엥침과 브제진카(비르케나우) 유대인 절멸 수용소를 목전에 둔 내 심장이 호닥호닥 뛰놀았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 Ⓒdoopedia 오슈비엥침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우슈비츠(독일어 지명)’의 폴란드어 지명이다. 폴란드에서는 오슈비엥침이 아닌 아우슈비츠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오슈비엥침으로 알고 가는 것이 좋다. 오슈비엥침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 〈안네의 일기〉 등에 등장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하면 자유로워진다(Arbeit Macht Frel)’라는 문구가 수용소 입구에 보란 듯이 적혀 있지만 이곳은 그야말로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나오지 못하는 지옥 같은 죽음의 수용소였다.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와 브제진카(비르케나우) 수용소는 폴란드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독일과도 비교적 가깝고 헝가리, 체코와도 멀지 않은 한마디로 중부 유럽의 중심이다. 때문에 유럽 각지에 있던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였다. 꽤 넓은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막사를 짓거나 감시를 하기에도 좋은 지형이었다. 오슈비엥침 지역에 위치한 대규모 수용소는 크게 3개로 나뉘어 있는데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는 폴란드 군대 막사를 개조해 만든 수용소로 약 1만~1만 2천 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었고, 제2수용소는 비르케나우라 불리며 최대 9만 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수용소로 유럽에서 최대 규모의 학살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는 모노비츠라 불리며 약 1만 1천 명가량을 수용할 수 있었다. (Daum 백과) 12시 30분에 입장을 했는데 꼼꼼한 몸수색이 이뤄졌다. 몸수색이 끝난 후, 잠시 기다렸다가 영화관에서 10분가량의 홀로코스트 관련 짧은 다큐멘터리를 봤다. 한국어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고맙기가 그지없었다. 영화가 끝나자 드디어 수용소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Arbeit Macht Frel’ 수용소 입구에 적힌 문구 아래에서 뚝 걸음이 멎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죽은 이들의 머리카락과 신발, 가방과 안경테 ... 그리고 어린 아이의 옷과 신발 앞에서는 긴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Arbeit Macht Frel’ ⒸWikidata 희생자들의 유품은 재활용되었다. 이들의 금니와 장신구는 금괴로 만들어졌으며, 뼈는 갈아서 골분 비료로 사용했고, 머리카락으로는 카펫을 짰다.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기 4장 7절).’ 인간의 죄악이 이토록 잔혹할까. 어둡고 칙칙한 지하 고문실은 가슴을 부여잡고 둘러보았다. 힘들었다. 결국 가스실이자 시체 소각장은 들어갈 수 없었다. 브제진카 수용소는 오슈비엥침 수용소에서 차로 5분,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완벽하게 복원된 오슈비엥침 수용소와는 달리 브제진카 수용소는 한창 복원 중이었는데, 그 규모가 오슈비엥침 수용소보다 훨씬 컸다. 건물 수가 300여 개였는데 벽돌로 짓다가 속도를 높이기 위해 목조 건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수용 인원이 늘었다는 반증이다. 유대인을 실어 날랐던 기차 한 칸이 철로 위에 놓여 있었다. 20여 명 남짓 탈 공간에 80여 명의 유대인이 숨도 못 쉰 채 실려 온 죽음의 기차였다.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 공간도 파괴된 화장터도 참담했다. 마지막으로 여성 수용자들이 묵었던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한 사람이 누워도 비좁은 한 칸의 딱딱한 침실 6개가 있다. 두 칸씩 3층으로, 1층인 바닥은 올라오는 한기와 습기에 새로 들어오는 수용자 차지가 되었다. 이 곳에 8명이 몸을 뉘였고, 수용자가 많아지면서 12명이 살았다. 여자 수용자 건물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나 있었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넓디넓은 들판에는 아름다운 들꽃들이 잔뜩 피었고, 꽃을 향해 날아드는 나비들이 자유로웠다. 그때도 지금처럼 꽃들은 향기를 내뿜었고, 나비와 새들은 자유로웠을 것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녔고,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으며, 밤하늘의 별들은 지나치게 빛났을 터. 오늘도 너무 화창한 날씨에 슬픔의 무게가 더 컸다. 나치의 잔혹한 행위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9년 오슈비엥침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무엇을 기억할 것인가?어떻게 기억할 것인가?한 보따리 숙제를 떠안은 듯 내 몸과 마음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