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희 아녜스(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미래세대연구자모임 샬롬회 회원) 2017년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큰 규모의 회사에서 잠시 계약직으로 출근한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출입증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직원이 출근할 때까지 문밖에서 서성여야 했다. 신입이라서 출입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이라서 출입증을 받지 못했다. 불편함에 못 이겨 회사에 건의했지만, 결국 퇴사할 때까지 출입증을 받지 못했다. 출근할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점심시간에도 하루에 몇 번을 남의 뒤를 쫓아야 했던 불편함은 비정규직에게만 보이고, 정직원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차별이었다. 각자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사회적 풍경은 달리 보인다. 누가 보기에는 평등해 보이는 세상이지만, 다른 누가 보기에는 잔뜩 기울어져 있는 세상이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에 사는 나는 주류 집단에 속해 있다. 주변 환경이 나에게 알맞게 만들어져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한편,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을 때 나는 많은 순간 불안했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안전하지 않게 느껴지자, 퇴근도 즐겁지만은 않았다. 주류가 아니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한국에서 누린 특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건물에 장애인 편의 시설이 없더라도, 버스에 휠체어 탑승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더라도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합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특권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고, 큰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나에게 아무런 불편함이 없던 구조물이나 제도가 누군가에게 장벽이 된다. 당연시하던 것들에서 소외되고, 사회 이곳저곳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나서야 나는 특권의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차별을 체감했다. 대부분 사람은 평등에 동의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차별이 차별로 인식되지 않고, 오랫동안 사회에 만연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불평등한 구조 일부가 된다. 옛날보다 많이 나아졌다는 말을 위안으로 삼곤 하지만, 실제로 이상적인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여러 객관적인 지표가 여전히 성별 소득 불균형을 나타낸다. 하지만 주로 남성이 많았던 직업군에 있는 고위직 여성 여성들이 눈에 띄기 때문에, 차별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이 나타난다. 과거 배제된 집단 구성원 가운데 소수만을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차별 시정정책인 ‘토크니즘’으로 차별에 대한 분노를 누그려 왔듯 말이다. 과거와 비교해 인종차별이 얼마나 개선되었는가를 묻는 설문에서 흑인과 백인은 서로 다른 응답을 하는 경향이 있다. 백인은 “많이 개선되었다”라고 말하고, 흑인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백인은 백인으로서 누리던 특권이 인종차별 개선으로 인해 줄어들게 되자, 이를 손실로써 체감했다. 이는 사람들이 손실과 이익 가운데 손실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손실 회피 편향’으로 설명된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가 평등해지는 것을 손실로 느낀다는 것이다. 사회가 평등해짐으로써 상대가 얻는 이익이 자신의 손실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평등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상대가 평등해지면 곧 나도 평등해지는 것이 당연한 논리인데, 이것이 구체적인 감각으로 와 닿지 않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싫은 걸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권리라고 여긴다. 2018년 9월, 인천에서 열린 성 소수자 축제는 날 선 반대에 직면했다. “동성애는 죄악이며, 사랑하니깐 반대한다”라며 축제를 훼방 놓으며, 소수자를 향해 ‘싫다, 혐오스럽다’라는 감정 표현을 권리라 말할 수 있는가? 이 책의 저자 김지혜 씨는 이를 권리가 아닌 권력이라고 말한다. 권력자를 향한 약자의 ‘싫다’라는 표현은 약자가 권력을 획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권력 그 자체일 뿐이다. 더욱이 ‘싫다’라는 표현이 단순한 심리적 성향에서 그치지 않고, 공공장소에서 발화되고 폭력의 형태를 띨 때, 그 표현은 쉽게 증오 범죄로 변질한다. 대부분 사람은 평등이라는 대원칙에 합의하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쓰는 단어에서, 무심코 하는 행동에서 차별하고 있지 않았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노릇이다. ‘결정 장애’이라는 단어를 쉬이 씀으로써 장애에 대해 열등함을 표현하고,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여긴 것을 아닐까.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그렇게 생겨난다. 평소 행동과 말을 비틀어 보자. 자신의 언행이 누군가를 불리하게 만드는 차별을 빚어내는 고정관념과 낡은 통념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깨어 생각해야 한다. 정의에 편에 서고, 소수자에게 연대의 손을 내미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기울어진 세상의 중심축이 옮겨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