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석 베드로 신부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소장)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제대로 해방되지 않았다.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은 나라를 반으로 갈랐고, 해방정국에서 공산주의 세력 견제에 주력했던 미군정에게 친일 문제의 청산은 특별한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는 끝났지만 이 땅에서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은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격변했던 국제정세도 불의한 역사의 청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심화되고 한국전쟁까지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기존 방침을 수정해 버린다. 공산주의 세력과 대립하는 극동에서 우방국이 필요했던 미국은 전범국 일본에 대한 처벌 대신에 ‘불의한’ 평화협약을 서둘렀다. 공산화된 거대한 중국의 한국전 참전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전쟁이 한창인 1951년 9월 8일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국 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여기서 미국은 일본에게 전쟁의 책임 문제를 따져 묻지 않았다. 이렇게 일본에게 자비를 베푼 미국은 태평양 건너의 우방이 동아시아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가 되기를 원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 장면 Ⓒ 한겨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화해하지 못한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해소되기 어려운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국내 정치권에서도 ‘친일’을 둘러싼 대립은 여전히 빈번하며, ‘악화된’ 한일관계 역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미중갈등이나 북핵문제까지 더해지면서 우방 미국은 대한민국이 일본과 더 긴밀히 협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제대로 된 화해가 없었던 동아시아에서는 이처럼 과거의 역사 문제가 현재의 ‘정의와 평화’와도 복잡하게 얽혀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7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화해를 어렵게 만드는 ‘역사의 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역사는 쉽사리 벗어던질 수 없는 폭력과 분쟁의 무거운 짐을 안고 있습니다. 권력의 남용, 핍박, 전쟁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러한 슬픈 사건들의 원인은 먼 과거 속에 묻혀 버렸어도 그 파괴적인 후유증이 남아 가정, 인종 집단 그리고 모든 사람 사이에 두려움, 의혹, 증오, 분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제30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3항) 이어서 담화는 과거의 죄악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기억의 치유’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역사 안에서 진실과 정의를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분쟁 당사자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이야기하는 이 담화는 “용서는 정의가 요구하는 배상의 필요성을 배제하지도 감소시키지도 않는다”는 사실도 적시하고 있다.(제30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5항)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 아직 화해하지 못한 동아시아에서 교회는 이 땅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 더 간절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믿는 빛의 자녀인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가 드러나는 평화, 참회와 속죄가 이뤄지는 화해를 소망하면서 함께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