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희 베드로 신부(의정부교구 7지구장) 믿는 이들에게 ‘평화’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신앙을 지닌 이들에게 평화는 하느님을 모시는 마음과도 같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평화는 바로 ‘신앙을 사는 것’과도 같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평화의 날 담화문에서 모든 신앙인들은 ‘평화의 전령사’, ‘평화의 장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선의를 지닌 모든 이들에게, 특히 믿는 이들에게 평화는 중요한 삶의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초대받은 모든 이는 평화의 길을 걸어야 할 기본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화를 향한 투신은 특별히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부과한 한 가지 의무입니다. 그리고 ‘평화의 임금님’(이사 9,5)을 안내자요 스승으로 삼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실로 더욱 그렇습니다”(1992.01.01. 제25차 담화). 평화를 건설하는 믿는 이들 믿는 이들은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겸손하고 신뢰에 가득한 끊임없는 기도가 요청됩니다. 믿는 이들에게 ‘기도’는 평화를 위한 도구가 됩니다. 믿는 이들은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이더라도 기꺼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모든 이는 그 평화가 언젠가 성취되리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기도는 이 평화를 탄원하고 획득하는 데 요구되는 힘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들에게 가능한 수단들,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다양한 정세 안에서 평화를 사랑하며 증진시켜 나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을 지지해 줍니다”(제25차 담화). 믿는 이들은 평화를 위한 기도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활동도 함께 실천해야 합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모든 행동들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과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믿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평화를 키워 자라게 하며 세상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평화를 담을 만한 품성을 지니기에 합당합니다. 평온, 균형과 자제, 이해와 용서와 관대함의 미덕을 지니고 행동한다면 평화는 우리 곁에서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황님은 평화를 위해 믿는 이들이 ‘함께 기도하고, 함께 행동’ 하기를 권고합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공유하기 위하여 평화는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핵심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으로서,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더욱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정의의 가치들을 실천하는 삶에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 정의의 가치들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22,39) 하신 사랑의 으뜸 계명으로 완성됩니다”(제25차 담화). 평화를 원한다면, 사회적 약자에게 다가가십시오!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는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빈곤과 궁핍을 낳게 하고, 또한 빈곤과 궁핍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빈곤’은 분쟁의 원천 가운데 하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전쟁과 빈곤의 악순환’에서 평화는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교황님은 분쟁의 원천인 이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평화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가난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빈곤과 불평등은 소수의 ‘독점’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의 재화를 이용하지 않은 채 쌓아두는 것이 빈곤과 불평등을 초래한다고 교황님은 지적합니다. 무절제한 소비를 지양하고 소박함과 절제라는 ‘가난의 정신’을 지닐 때 우리는 복음적 가난의 의미를 살아낼 수 있습니다. 조토 디 본도네, <아버지의 재산을 포기하며 옷을 벗는 프란치스코>, 1297-99 복음적 가난은 일상적 가난과는 다릅니다. 즉, 복음적 가난은 사회 경제적 빈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회 경제적 빈곤은 강제의 한 형태로 경험되기 때문에 잔혹하고도 종종 비참한 경향을 띠지만, 복음적 가난은 그리스도의 권고에 응답하려는 사람이 자유로이 선택한 것입니다”(1993.01.01. 제26차 담화). “이 같은 복음적 가난이 평화의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이 가난을 통해 개인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다른 사람들, 창조물과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적 가난으로 살아가는 이의 삶은 인류가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물질 재화는 그 존재 목적, 곧 모든 이의 선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로 인정받게 됩니다”(제26차 담화). 복음적 가난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변화된 삶은 다른 이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그들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선택한 가난한 삶의 선택으로 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내어줄 수 있습니다. 복음적 가난은 평화를 지향합니다. 그러기에 복음적 가난은 평화의 원천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교황님은 담화문의 결론으로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여러분이 평화를 원하거든, 사회적 약자에게 다가가십시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서로 형제이며 자매라는 것을 인정하기 바랍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모든 이를 사랑하시고, 모든 이의 선을 의도하시며, 그리고 모든 이에게 평화의 선물을 건네시는 한 분 하느님의 자녀로서,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바랍니다!”(제26차 담화). 신앙을 지닌 우리 모두가 평화를 위해 끊임없기 기도하고 복음의 정신으로 가난과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의 평화’는 우리가 가운데 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