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원(북한대학교대학원 박사 수료) 일반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박하다. 특히 북한은 최고 존엄이라 일컫는 김씨 일가를 제외하곤 현존하는 사람들에 대한 칭찬에 매우 인색하다. 하물며 한국은 북한의 적국(敵國)이며, 그 적국을 이끈 역대 대통령들에 대해선 더 말해 무엇하랴 싶다. ‘군사독재’, ‘민족반역자’ 등의 수식어는 기본이고 한국 대통령들이 ‘저지른 만행’을 일일이 나열하며 악평한다. 이런 북한에도 예외적인 대통령이 있으니,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북한에서 살던 2000년대 초반 무렵 남한의 역대 대통령들을 평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민주주의 투사’라고 평했던 대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의외의 평가였기 때문이다. 북한의 모든 출판 도서는 ‘공식적인’ 성격을 띤다. 각급 당 조직의 검열과 평가를 거친 도서만이 출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번 다시 봤고, 지금 남한이랑 사이가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정말로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곱씹었다. 그러다 친구들과 책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아는 정보가 한정돼 있다 보니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북한의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1부(최현덕 편)에 나오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이어졌다. 한 친구가 “김대중 씨 미안하게 됐소, 이젠 편안하게 저승에 보내주지”라며 영화 속 대사를 익살스럽게 재현했다. 김대중 야당 대표를 바다에 수장하기 전 방수포로 둘둘 말아 꽁꽁 묶고, 커다란 돌덩이를 달면서 중앙정보부의 한 요원이 이죽대며 이 같은 대사를 던지는 장면이 있다. 2000년 6월 14일,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15공동선언에 서명한 뒤 교환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는 아마도 지금 남북관계가 좋은 탓일 거라며 속단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어떻게 살아남았지?”라는 의문도 품었다. 북한에서 정치범들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2000년대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때도 그렇고, 김대중 납치사건도 그렇고, 그렇게 몇십 년을 감옥살이해도 살아남을 수 있고 현 정권을 정면으로 타도해도 숙청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신기했다. 2000년 6월15일 정상회담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 중앙포토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인지도는 아무래도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남조선(한국)의 대통령이 우리나라(북한)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고, 겸손하고 소박한 한국 대통령의 모습은 북한 주민들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김 대통령의 불편한 걸음걸이가 눈에 띄면서 사람들의 궁금증은 증폭했고, 옥고의 흔적이라느니, 음해의 흔적이라느니 하는 소문도 무성했다.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고, 인터넷도 없는 북한에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몇 안 되는 책자와 진위(眞僞)를 알 수 없는 ‘소문’뿐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이후 남한의 영상물이 북한 전역을 휩쓸었다. 남북한 화해 무드는 주민들의 마음을 기대로 채웠고, 활발해진 남북교류로 한국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분위기가 됐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부모들끼리 사이가 좋으면 아이들도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국가수반들끼리 사이가 좋으니까 백성들도 좋아지지 않겠나.” 1990년대 아사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난 북한 주민들에게 2000년대는 혼란과 기대가 뒤섞인 일종의 ‘희망기’였고, 북·일, 북·중 무역의 활성화로 수입 물품이 대량 유통되면서 자본주의의 단맛을 조금씩 느끼고 있던 때였다. 여기에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으로 남북교류의 물꼬가 트이면서 시장엔 물건이 풍성해졌고, 장사 기회도 많아졌다. 죽기 전에 비행기 타고 중국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던 친구들은 목적지를 제주도로 바꿨다. 더 이상 막연한 것이 아닌 실현 가능한 꿈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최근 남북은 전쟁도 불사할 것처럼 서로를 압박하고 있다. 올해 들어 북한은 한 달이 멀다하게 군사적 도발을 이어온 가운데, 10월에는 일주일에도 여러 번 포사격과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도발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우리 군도 대응 사격과 한미 군사훈련, 한미일 안보강화 등으로 강대강 맞대응을 이어가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아지고 있다. 연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발된 러·우 전쟁을 통해 우리는 매일 전쟁의 참화를 지켜보고 있다. 전쟁의 승패를 떠나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 당사자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을 남긴다. 이미 전쟁을 겪은 한반도가 또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계셨다면 현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일상이 되어가는 현실이 참으로 암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