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선 벨라뎃따(평화사도 1기 & 동화작가, 평화운동가)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작은 나라가 있었어. 작은 나라는 온통 바다와 맞닿아 있고, 육지와 맞닿은 곳에는 도깨비가 사는 성이 있었어. 도깨비 머리에는 뾰족한 뿔이 세 개나 솟았고, 귀밑까지 쭉 찢어진 입을 한껏 벌리면 호랑이가 들락날락 할 수 있대. 콧구멍은 어찌나 큰지, 콧김을 한 번 내뿜으면 덩치 큰 곰도 십 리 밖으로 휙 날아간다는 거야. 어이쿠, 무셔라. 그러니 도깨비 성 근처는 얼씬도 못하는 거지. “대왕마마, 큰일 났사옵니다.”“정의 장군 무슨 일이오? 도깨비가 나타난 줄 알겠소?”“그... 그게 아니오라, 물 건너 나라에서 여차하면 쳐들어올 기세랍니다.”“뭣이라! 물 건너 나라에서 쳐들어온다고? 전쟁이 나면 백성들이 다칠 텐데, 큰일이 아니오.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칠 테고, 집도 불탈 텐데 이를 어찌한단 말이오.” 임금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어. 임금님은 백성들을 아주아주 사랑했거든. 아침에 눈을 뜨면 간밤에 백성들이 잘 자고 일어났는지 걱정했고, 해가 중천에 뜨면 밥은 먹었는지 걱정되었고, 해가 지면 별 탈 없이 일을 잘 마무리했는지 걱정했지. 임금님은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짓도록 대포 대신 호미와 쟁기를 만들었어. 풍년이 들어야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임금님 머릿속에는 온통 백성들 생각뿐이었지. 그런데 전쟁이라니?“마마, 이 방법은 어떨까요?”정의 장군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어. ‘도깨비를 만날 사람을 찾습니다.도깨비를 만나고 온 사람에게는 원하는 걸 모두 주겠습니다.’ 다음 날 여기저기 사방팔방에 방이 붙었어. 그러나 도깨비를 만나러 가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거야. 곧 전쟁이 터질 거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어. 애가 탄 백성들은 농사를 짓는 시간보다 한숨을 내 쉬는 시간이 많아졌어. 애가 탄 임금님도 백성을 생각하는 시간보다 한숨 쉬는 시간이 더 많아졌지. 보름쯤 지났을까? 허리에 칼을 차고, 어깨에 활을 둘러맨 왼쪽 나라 왕자가 배를 타고 나타났어.“용감한 왕자여, 부디 도깨비를 물리쳐 주시오.”“반드시 물리치고 오겠사오니, 제 청을 들어 주십시오.”“말해보게나.”“공주님을 저에게 주십시오.” 듣고 있던 공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어. ‘달라니, 내가 물건이야.’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어. 임금님 눈빛이 너무너무 간절해 보였거든.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신이 난 왕자는 말을 타고 달려 도깨비 성에 도착했어.“이놈 도깨비야, 당장 성문을 열렷다.” 왕자가 목에 핏대를 세웠지만 성문은 열리지 않았어. 두 눈을 부릅뜬 왕자가 시퍼런 칼날을 휘둘렀지만 성문은 열리지 않는 거야. 밤늦도록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느라 기진맥진해진 왕자는 터덜터덜 궁궐로 돌아갔어. 임금님과 백성들 한숨 소리는 더 잦아졌어. 왼쪽 나라에서 가장 힘센 왕자도 못 뚫는 성문인데 누가 열겠어. 이제 전쟁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야. 백성들은 농사짓는 일도 잊고 한숨 쉬는 게 일이 돼 버렸어. 임금님도 백성을 돌보는 일을 잊고 어좌에 앉아 머리를 감싼 채 한숨 쉬는 게 일이 돼 버렸지. 그런데,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오른쪽 나라 왕자가 배를 타고 나타났어. 왕자는 쇠로 만든 방망이를 들었어. 쇠방망이 끝에 뾰족뾰족한 쇠 가시가 달려있는 게 어찌나 무시무시한지 몰라.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쇠방망이를 나뭇잎처럼 들고 있는 걸 보니, 힘이 천하장사야. 그러나 오른쪽 나라 왕자 역시 성문을 뚫지 못했어. 백성들은 울음을 터뜨렸어. 임금님도 남몰래 눈물을 흘렸지. 그 눈물이 베개를 흠뻑 적셨고 이불까지 적셨어. 임금님은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한 채 앓아눕고 말았어. 아무래도 안 되겠어. 공주는 갑옷을 입고 칼을 허리에 찬 후 몰래 궁궐을 빠져나왔어. 도깨비 성이 가까워질수록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팔이 덜덜덜 떨리고, 이까지 딱딱딱 부딪히는 거야. 이 나라 공주로서 물러설 수 없지. 이를 앙다물고 앞으로 나아갔어. 드디어 성문 앞에 다다랐어.“나쁜 도깨비야...”말해놓고도 너무 작은 소리라 부끄러웠어. “이, 나쁜 도깨비야.”배에 힘을 주고 소리쳤어.“그렇게 해선 문이 안 열릴 겁니다.”공주는 뒤를 돌아봤어. 꼬부랑 할머니야. 한 손에는 지팡이를, 한 손에는 커다란 들꽃 다발을 들고 있어.“할머니, 여긴 위험해요.”“내가 위험하면, 공주님도 위험할 테지요”“저는 갑옷과 칼을 찼으니 괜찮아요. 어서 돌아가세요.”공주는 할머니 등을 떠밀고는 긴 칼을 움켜쥐었어.“지금까지 보고도 모르시겠습니까, 칼로는 성문을 열 수 없지요.”“할머니께서 성문 열 방법을 알고 계신가요?”“알다마다요.”꼬부랑 할머니가 성문 가까이 다가왔어. 똑똑똑, 할머니가 성문을 가볍게 두드렸어.“도깨비님, 계세요? 저는 감나무 집에 사는 늙은이라오. 부탁할 일이 있어 도깨비님을 만나 뵙고 싶은데, 문 좀 열어 주실라오?”할머니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부탁했어. 벌컥,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성문이 활짝 열리는 거야.“어서 오세요. 할머니.”머리에 뿔이 하나 달린 도깨비가 벙실벙실 웃으며 할머니와 공주를 내려다보았어.“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들판에 핀 꽃을 꺾어왔다오. 마음에 들지 모르겠소.”할머니는 들꽃 다발을 도깨비 앞으로 내밀었어. 함께 온 나비가 팔랑팔랑 춤을 추네.“어머나, 꽃다발이라니. 고마워요, 할머니.”도깨비는 꽃다발에 코를 박고 흠흠 꽃향기를 맡았어.“도깨비님, 그동안 왜 문을 열지 않았지요?”도깨비는 공주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어.“지금까지 찾아온 사람들은 고래고래 악을 써대거나, 욕을 퍼부었어요. 심지어 무기를 휘두르더군요.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성문을 열겠어요. 공주님이라면 문을 열어주겠어요? 할 얘기가 있으니 성문을 열어달라고 정중히 부탁한 사람은 할머니가 처음이에요. 이렇게 꽃다발까지 받으니 너무 좋아요. 안으로 들어가서 차 마시며 얘기를 나눌까요.”도깨비는 할머니와 공주를 성안으로 안내했어. 성안은 성 밖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야. 똑같아.“민들레 차예요.”할머니가 향기를 맡고는 홀짝 차를 마셨어. 공주도 향기를 맡고는 홀짝 차를 마셨지. 참 맛난 차야. 공주와 할머니와 도깨비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