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초대 교회의 주요 인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할

니콜라스 스탠대르트(Nicolas Standaert), SJ / 발행일: 2017년 3월 1일 2022년 「평화의 길」 특별 기획으로 이웃 국가 중국의 ‘천주교회’의 역사와 오늘날의 모습, 그리고 바티칸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관련 칼럼을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글의 영역본은 예수회 교양지 「치빌타 카톨리카」(La Civiltà Cattolica)의 <교회 생활Church Life> 코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링크 : https://www.laciviltacattolica.com/important-figures-early-church-china-role-christian-communities/ 약 50년 전, 예수회 소속의 조지 듄(George H. Dunne)은 17세기 초의 중국 예수회 회원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거인의 시대(Generation of Giants)”라는 제목의 성공적인 책을 펴냈다. 많은 선교 역사기록이 그러하듯 조지 듄은 마태오 리치(Matteo Ricci)와 같이 잘 알려진 선교사에 초점을 맞추었고, 중국의 그리스도교 발전에 있어 그들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선교의 역사에 있어 누가 거인이며, 그들은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가? 본 기고에서는 오늘날까지 중국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소홀히 다뤄졌던 “주변인(other)”의 측면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즉, 선교사가 아니라 중국인,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엘리트뿐만 아니라 보통의 그리스도인,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 중점을 둘 것이다. 그들의 역사를 서술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소개할 것이다. 이는 사도행전에 나온 내용으로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 기술에 있어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주변인”의 관점에서 기술된 선교의 역사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의 성공적인 선교활동이 기술되어 있다. 어느 날, 야포에서 베드로는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다. 배가 고파진 베드로는 환시를 보았는데, 하늘이 열리고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왔다. 그 안에는 네발 달린 짐승들과 땅의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그 다음날, 베드로는 카이사리아에 가서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를 만났다. 코르넬리우스는 베드로를 자기 집 식사에 초대했다. 베드로는 주저했지만 결국엔 받아들이며 말하였다. “유다 사람에게는 다른 민족 사람과 어울리거나 찾아가는 일이 불법임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더럽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다른 문화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다른 문화로 하여금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도록 하였다. 이는 새로운 문화를 속되거나 더럽다고 여기지 않고 이에 적응하도록 부름 받은 선교사의 회심이었다. 이 구절은 베드로의 정체성(자아)이 주변인의 행동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중요한 방법론적인 발견으로 귀결되는데, 정체성이라는 것은 자기자신의 독립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 된 것은, 그가 주변인과 상호작용하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인물들의 정체성에서도 동일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들은 주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들 자신의 모습으로 성장한다.[1] 그렇지만 여기서의 이야기 방식은 사도행전에서의 방식과 같지 않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루카는 이 사건들에 대한 기술을 야포(사도 10, 9-23)가 아니라 카이사리아(사도 10, 1-8)에서 시작한다. 여기서의 요약과는 달리, 루카는 신심이 깊고 가족과 함께 하느님을 경외했던 코르넬리우스의 환시를 먼저 기술한다. 하느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말하였다. “너의 기도와 너의 자선이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 좋게 기억되고 있다. 이제 야포로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여라.” 이에 코르넬리우스가 두 명을 보내는데, 그들은 베드로가 환시를 보던 중에 도착한다. 그들은 베드로를 카이사리아로 초대한다. 더욱이 코르넬리우스는 집에 혼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들이 세례를 받기 전 그들 모두에게 성령이 내렸다. 결국, 그들의 움직임은 예루살렘의 기존 공동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 공동체 앞에서 베드로가 본인의 행동을 변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중히 생각한 후, 예루살렘의 기존 공동체는 카이사리아에서 일어난 일을 받아들인다. 공동체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한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1688),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이 “거인의 세대”로 여겨지게 된다. 또 다른 접근 방식은 수용 공동체를 시작점으로 삼아, 회심 과정에서 적극적인 참여자로서의 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본 기고에서는 후자의 접근 방식을 취할 것이다. 중국인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각 선교사와의 상호작용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17세기 중국에서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형성해왔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는 중국인 대 유럽인, 또는 “위인” 대 “일반인”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공 여부는 서로 다른 집단 간의 대립이 아니라 상호작용에 달렸기 때문이다. 루카의 역사기술과 비슷하게, 17세기와 18세기에 발생한 서로 다른 상호작용에 대해 선택적이지만 다양한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중국 그리스도교 역사의 이면을 기술할 것이다. 시광치 바오로(Paul Xu Guangqi, 서광계 徐光啟, 1562-1633), 리즈자오 레오(Leo Li Zhizao, 이지조 李之藻 1565-1630), 양팅윈 미카엘(Michael Yang Tingyun, 양정균 楊廷筠, 1562-1627), 왕정 필립보(Philip Wang Zheng, 왕징 王徵, 1571-1644) 등과 같이 잘 알려진 개종자에도 중점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당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일반인, 여성, 교리교사, 익명의 많은 회원으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주목할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온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서로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중국 교회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부 통계 공동체 활동을 언급하기 전에, 통계에 대한 개요를 간략히 설명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2] 수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스도교는 대체로 17, 18세기 중국에서 다소 미미한 현상이었다. 마테오 리치가 30년간의 선교 끝에 1610년 베이징에서 사망했을 당시, 중국의 그리스도인은 약 2천 5백 명이었다. 1665년에는 약 8만 명, 1700년에는 20만 명 정도의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전체 인구에 비하면(1억 5천만 명에서 2억 명) 여전히 적은 수였다. 선교사 수는 제한적이었다. 마테오 리치의 사망 당시 중국의 예수회 회원은 총 16명으로, 8명의 중국인 수사와 8명의 유럽인 사제가 있었다. 1630년대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가 중국에 소개되고 예수회 회원 수도 약간 증가하면서, 외국인 선교사 수가 많아져 30명이 넘게 되었고, 이후 30년간 30~40명 사이를 꾸준히 유지했다. 이후 외국인 선교사 수는 증가하여 1701~1705년 약 140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은 지속되지 않았고, 중국 의례논쟁으로 인해 선교사 수는 거의 반이 감소했다. 18세기 후반, 중국 예수회의 약 3분의 1은 총 50명에서 70명가량의 중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거의가 사제였다. 한편 일부 수도회는 외국에 신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효과적이었고,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중국인 사제들은 지속성과 성장에 있어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수행했다. 1800년경에는 약 75명의 사제 중 50명이 중국인이었다. 당시 중국 인구 총 3억 명 중 그리스도인의 수는 대략 15만 명을 웃돌았다. 이러한 통계자료는 전체 인구에 비해 그리스도인이 매우 소수일 뿐 아니라, 성직자도(외국인이나 중국인) 공동체 수에 비하면 적은 소수만을 대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공동체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들 공동체의 존립은 성직자가 아니라 그 내부 조직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이들 공동체는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직접 17세기의 초대 공동체를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는다. 이들이 바로 이 1세대의 후계자들이다. 이 수치는 중국의 복음화 과정의 또 다른 면도 보여준다. 근현대 자료에서 중국 선교의 이미지는 황실 선교사, 개종한 고관, 과학 기술 분야의 출판물 등 고급 문화 수준의 상호작용과 같이 대부분 엘리트 선교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인구 통계를 보면 이 이미지는 다른 시각으로 그려진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 엘리트는 전체 가톨릭 인구의 1~2%에 불과했으며,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아마 10%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문맹인 평민이었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극빈자라는(재산이 거의 없는) 사실에 대해 자주 불평했다. 그러나, 부자는 속세, 재물, 첩에 대한 애착이 커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더 어렵다는 증거로 보기도 했다. 이러한 평민들에 대한 주요 자료는 엘리트에 관한 자료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는 효과적인 의례 공동체의 형태를 통해 사회의 대중적인 계층에서 가장 강력하고 견고하게 뿌리내렸다. 효과적인 의례(rituals) 공동체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공동체 차원에서 중국의 종교 문화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것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예가 교회의 조직이다. 불교 사찰이나 도교 사원 외에도, 중국의 종교 단체는 모임(會)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공덕을 쌓는 성직 생활에 평신도가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 중 하나였다. 형식적인 체계를 갖추고, 정기적으로 만나던 단체가 있는가 하면, 더 느슨한 단체도 있었다. 활동에는 신심활동, 자선활동, 지역 내 사원 지원 등이 있었다. 이는 불교 및 도교 단체뿐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유교 단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17세기 중국 그리스도교는 본당, 즉 교회 건물을 중심으로 한 지리적 단위가 아니라, 평신도가 이끄는 단체에서 조직되었다. 일부 단체는 중국식 단체와 유럽에서 영감을 받은 성모회(현 Christian Life Community)가 혼합된 형태였다. 대부분의 모임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개방되었지만, 여성, 어린이, 지식인, 교리교사를 위한 특별한 모임도 있었다. 그리스도교 단체가 널리 퍼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면, 1665년경 상하이에는 약 140개의 단체가 있었고, 도시와 마을 등 중국 전역에는 400개가 넘는 그리스도교(christianitas) 단체가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효과적인 의례 공동체의 형태를 통해, 즉 생활이 특정 의례(미사, 축일, 고해 등)를 위주로 구성되었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통해 이렇게 지역별로 뿌리내렸다. 모임을 조직했다는 점과, 모임의 구성원들이 의례 공동체가 의미와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여겼다는 점에 있어서 의례 공동체는 효과적이었다. 효과적인 의례는 주요 전례 축일(크리스마스, 부활절, 오순절 등)뿐 아니라 성인 축일이 포함된 그리스도교 전례력에 따라 형식화되었다. 주일 및 다른 그리스도교 축일의 도입으로 사람들은 불교나 도교 공동체의 전례력과는 다른 주기에 따라 살게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의례는 성사였는데, 특히 가끔 거행되던 성체성사와 고해성사가 그러했다. 그렇지만 공동 기도, 특히 묵주기도와 호칭기도 암송, 특정한 날의 금식은 가장 중요한 의례의 순간에 해당했다. 이 특징은 유럽 종교성의 기본적인 부분에 해당한다. 반면, 그리스도교 의례가 중국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종교적, 사회적 경험의 일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면에서 중국의 종교적인 환경과 지역 사회의 종교적 관용 풍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중국 종교성의 기본적인 특징도 드러낸다. 극히 평신도 중심이며 평신도가 지도자로 있는 공동체, 가정 안에서 의례와 전통의 전달자로서 여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 서비스 중심의 사제직 개념(중요한 축일이나 전례 거행 시에만 참석하는 순회사제),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교리(구송 기도, 단순하고 명확한 도덕적 원칙), 변화를 가능케 하는 의례의 힘에 대한 믿음이 바로 그 특징이다. 공동체는 점진적으로 자체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3] 순회 사제는(초기에는 외국인이었으나 18세기에는 주로 중국인) 일 년에 한두 번 그들을 방문했다. 보통 공동체 지도자가 일주일에 한 번 구성원들을 모아 기도를 주관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기도를 외우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성서를 읽고 종교교육을 했다. 여성을 위한 별도의 회의가 자주 있었으며, 어린이, 예비신자, 새신자를 가르치는 순회 교리교사도 있었다. 사제의 부재 시 지역사회의 공동체 지도자가 세례를 주었다. 선교사는 연례행사로 며칠 동안 방문하여 지도자, 구성원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공동체의 소식을 듣고, 아픈 사람과 예비신자 등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그들은 고해성사를 주고,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강론하고, 세례를 주고,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였다. 선교사가 떠난 후, 공동체는 묵주기도와 호칭기도를 바치는 일상적인 관행을 지속했다. 그러므로, 보통의 그리스도인은 선교사를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질적인 중심은 선교사가 아니라 공동체 지도자와 교리교사를 주요 연결고리로 하는 공동체 그 자체였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초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실천을 전파하는 데 있어 작지만 견고한 주축으로 발전하였다. 선교사와 사제가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 회원, 즉 교리교사, 미혼자, 평신도 지도자 등은 재정 운영부터 찬송기도를 이끌고, 세례를 주는 등의 의례 거행까지 모든 것을 관리했다. 이는 1840년대에 사제, 주교, 선교사가 중국에 새로 왔을 당시, 종종 지역 공동체와 새로 온 성직자 간의 심각한 갈등을 촉발하기도 했는데, 유럽에서는 평신도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끄는 상황은 익숙한 모습이 아니었다.[4] 이들 공동체에서 구송기도(묵주기도, 호칭기도 등)의 중심 역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그리스도교가 오늘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이 기도 공동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뿐 아니라, 읊어지는 기도가 과거와 직접적인 연결고리임을 드러낸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중국 본토의 많은 교회의 미사에서 여성 노인이 바치는 기도문의 기원은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만약 “광범위하게 봤을 때 그리스도교 종교 문화의 진정한 척도는 반드시 시간, 공간 및 예식 거행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전례주년의 관점에서 정의되고 파악되는 정도여야 한다”[5]라고 한다면, 이 효과적인 그리스도교 의례 공동체의 존재는 중국에서 그리스도교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다음 두 섹션에서는 특정 행위자(여성)와 특정 의례(장례식)를 각각 선정하여 이들 의례 공동체의 기능을 더 심층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여성 중국 그리스도교의 역사 연구에서 자주 소홀히 다루어지는 대상은 여성이다. 이들 공동체에서 여성은 의례 전달자로서 중국의 그리스도교 전파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6] 여성의 전기는 상대적으로 역사 자료에 거의 나와 있지 않다. 잘 알려진 예외 사례로는 시광치의 손녀인 시칸디다(Candida Xu(Hiu), 徐甘第大, 1607-1680)가 있다.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회 필립 쿠플레(Philippe Couplet)에 의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이탈리어로 출간되었다(1680년대-1690년대). 미망인이었던 시칸디다는 그리스도교 발전에 있어 영적, 물질적으로 상당한 도움을 준 인물로 묘사된다. 시칸디다는 본인 가족의 교리교사였으며, 그리스도교 단체 활동을 강력히 장려했다. 여성의 사목 지도와 관련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여성을 대상으로 종교문학을 보급할 것을 예수회에 제안했고, 중국 정서와는 달리 어떻게 사제에게 고해하는지를 여자아이들에게 직접 교육했다. 성당을 짓고, 꾸미고, 선교사를 지원하고, 빈곤층과 고아를 돕는 일 등에 있어서도 그녀의 상당한 재정적 도움은 매우 중요했다. 시칸디다의 전기를 쓴 작가는 이 전기를 통해 유럽 여성, 특히 부유한 미망인들이 시칸디다라는 훌륭한 중국 그리스도인에 대해 알게 되어, 그녀가 중국인의 개종을 위해 애썼던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감화되기를 바랐다. 모범이 되는 여성상이 시칸디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교사의 글에서 종종 다른 모범 사례가 등장하는데, 글에서 그들의 용기, 헌신, 선행은 늘 높게 평가되어 있다. 일부 출처에서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는 여성이었다고 밝힌다. 중국의 그리스도교 연구에서 여성이 등한시된 이유는 중국 사회 내 여성의 위치 때문이었다. 여성은 가정의 테두리 안에 있었고, 여성과 남성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어 접촉이 금지되어(물리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제는 남편으로부터 먼저 가르침을 받은 여성에게 간접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일단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 여성은 자주 가정 내에서 믿음과 신심 전파의 매우 적극적인 주체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부 선교사에게 있어 중국인 개종의 핵심은 여성이었다. 이들 여성은 불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단식뿐 아니라 기도를 바치는 자신들만의 전례를 구성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을 위한 별도의 단체, 심지어 교회도 생겨나 그들만의 소통 네트워크를 갖게 되었다. 교리교사로 교육받은 일부 여성은 죽음을 앞둔 영아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다. 순회 사목을 돌던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세례를 준비시키던 여성 교리교사도 있었다. 일부 여성은 혼인하지 않고 순결서약을 함으로써 특별한 방식으로 종교적인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여성이 분명히 스스로를 관상생활로 제한했지만, 18세기 후반에는 복음화와 사회봉사의 사명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여아를 가르치고, 세례받을 예비자를 교육하고, 죽어가는 영아에게 세례를 주고, 기근 구호 및 의료 활동에 참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이 가장 지속적으로 기여한 부분은 교사로서 학교에서 여아들을 교육한 것이다. 1800년경, 중국 다른 지역의 여성은 때때로 정부 관리가 서양 선교사, 심지어 자국 성직자조차 추방하는 경우 교회 재산의 관리인 역할을 위임받았다. 장례식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의례를 전파하는 데 있어 여성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능에 대한 연구를 위해 혹자는 장례식을 그 구체적인 사례로 꼽을 것이다. 장례식은 중국의 통과의례 중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간주된다.[7] 17세기 장례의식의 기본적인 구조는 평신도 중심이었다. 가족 구성원이 주요 주체가 되어 장례의식을 가정 내에서 치렀으며, 때로 불교 승려나 도교 사제의 특별한 의례가 추가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주요 장례예식은 입관 시 고인의 집에서 거행되었다. 장례 위패와 고인의 초상화 앞에서 가족 구성원은 의식을 거행하고, 향과 음식을 바치고, 엎드려 절을 함으로써 상징적인 방식으로 고인을 조상으로 변모시켰다. 관은 보통 몇 달에서 일 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집에 보관되었고, 그동안 일가친척과 승려가 집을 방문해 애도를 표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순간은 매장이었다. 관이 마을을 떠나 묘소로 가는 길은 인상적인 장례 행렬이 인도했다. 이 의식의 주요 의미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의 표현이었다. 같은 시기 유럽의 장례의식은 여러 면에서 달랐는데, 특히 10세기 이후 사회적, 신학적 변화가 발생한 이후 그러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원래 고인의 집에서) 이전 세기와는 달리, 그 이후에는 사제가 주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교회에서 집전되는 장례 미사가 가장 중요했으며, 미사 후에는 고별식을 거행하고 바로 매장하였다. 처음 중국에 도착한 선교사는 유럽 전통에 따라 유럽의 의식을 재현하여 다소 차분한 장례식을 고집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중국 그리스도인은 부모와 조상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 그들은 장례의식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로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지내던 중국 장례식과의 상호작용은 두 개의 전통이 뒤섞인 중국식 기독교 의식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도인이 사망하면 고인의 집에서(교회가 아니라) 기본적인 의식이 거행되었고, 가족 구성원이 이를 지휘했다. 사제의 역할은(어떤 것이 있다면) 주변화되었다. 공동체는 사제에게 고인을 추모하는 미사를 따로 요청했으나 시신을 성당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고인의 집에 함께 모여, 미신이라고 여겨지던 일부 의식을 제외한(예: 지폐 태우기) 중국 전통 의례(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등)에 참여함으로써 장례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두드러진 역할은 입관과 매장 시 기도를(묵주기도 포함) 암송하는 특징이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활동은 가족 구성원이 수행하던 장례의식에 함께 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가족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가족은 더 넓은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오늘날까지 의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 때문이다. 이는 더 최근의 자료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 평신도가 장례식에서 “위령 성무일도”(유럽에서는 보통 성직자용 매뉴얼)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20세기에 정기적으로 보고되었다. 1990년대에 수행된 인류학 연구에 따르면, 평신도가 주관하는 장례식은 중국 마을의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매우 인기가 많았다. 세대에 걸친 의례의 전승은 애초에 사제가 아니라 공동체와 평신도 지도자에 달려있었다. 아마도 중국 그리스도교 장례의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참석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파악하고 그들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을 뿐 아니라, 더 넓은 중국 공동체에 그들이 통합되도록 했을 것이다. 실제로 장례의식은 중국 전통 자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 비배타적인 통합을 촉진했다. 결론 이 기고문은 초대 중국 교회를 만든 위대한 인물들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중국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사료 편집의 최근 발전에 맞춰서, 선교사가 아니라 중국 그리스도인에 초점을 맞추었다. 더욱이 후자 중 엘리트가 아닌 일반 그리스도인과 종종 익명의 그리스도인,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도 중점을 두었다. 또한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주목했다. 마지막으로 사상이나 교리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이들이 거행하고 전승하던 의례에 집중했다. 코르넬리우스와 베드로의 이야기처럼, 가톨릭 공동체의 탄생은 주변인과의 살아있는 상호작용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중국의 가톨릭 공동체는 이러한 초대 공동체로부터 생활 양식의 많은 면을 물려받았고, 그들로부터 정체성을 이끌어 냈다. 필자 소개 - 필자 니콜라스 스탠대르트(Nicolas Standaert)는 벨기에 예수회 신부로, 중국학자이자 루벤 대학교(University of Leuven) 교수이다. [1]. N. 스탠대르트, 선교에서의 주변인: 중국에서의 교훈, 브뤼셀, 레시우스, 2003 참고. (N. Standaert, L’“autre” dans la mission: Leçons à partir de la Chine, Brussels, Lessius, 2003.) [2]. 더 자세한 참고 문헌은 N. 스탠대르트(편집), 살아있는 상호작용: 1권(1635-1800), 레이덴, 브릴, 2000, 300-305; 380-393 참고. (N. Standaert (ed.), living interaction: Volume One (1635-1800), Leiden, Brill, 2000, 300-305; 380-393.) [3]. L. M. 브로키, 동양으로의 여정: 중국으로의 예수회 선교, 1579-1724, 캠브리지,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 2007, 특히 II부: “교회 건립”(L. M. Brockey, Journey to the East: The Jesuit Mission to China, 1579-1724,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 especially part II: “Building the Church); E. 메네곤, 조상, 동정녀, 수사: 후기 중국 제국에서 지역사회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 캠브리지, 하버드 대학교 아시아 센터, 2009(E. Menegon, Ancestors, Virgins, and Friars: Christianity as a Local Religion in Late Imperial Chin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9); Zhang Xianqing, Guanfu, zongjiao yu tianzhjiao: 17-19 shiji Fu’an xiangcun jiaohui de lishi xushi, Beijing, Zhonghuao shuju, 2009; H. 해리슨, 선교사의 저주, 중국 천주교 마을의 다른 이야기들,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 2013(H. Harrison, The Missionary’s Curse and Other Tales from a Chinese Catholic Villag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3); Sichuan, 18세기 선교의 연대기: 중국 사제, 선교사, 공증사도였던 André Ly의 일기, 1745-1764, 파리, Youfeng, 2015(Sichuan, chronique d’une mission au XVIIIe siècle: Journal d’André Ly, prêtre chinois, missionnaire et notaire apostolique, 1745-1764, Paris, Youfeng, 2015) 참고. [4]. D. E. 먼젤로, “1841년 예수회의 중국 귀환과 중국 그리스도교의 반발”, 중국 서양 문화 관계 저널 27 (2005) 9-46(D. E. Mungello, “The Return of the Jesuits to China in 1841 and the Chinese Christian Backlash”, in Sino Western Cultural Relations Journal 27 (2005) 9-46); Huang Xiaojuan, “중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대체 신심, 1780-1860”, 박사논문, 프린스턴 대학교, 2006(Huang Xiaojuan, “Christian Communities and Alternative Devotions in China, 1780-1860”, Ph. D. diss. Princetown University, 2006); L. P. 라만, 중국 제국 말기의 그리스도교 이단: 그리스도교 토착화와 국가 통제, 1720-1850, 애빙던, 루틀리지, 2006(L. P. Laamann, Christian Heretics in Late Imperial China: Christian Inculturation and State Control, 1720-1850, Abingdon, Routledge, 2006) 참고. [5]. J. 반 엔젠, “역사학적 문제로서의 그리스도교 중세”, 미국 역사 리뷰 91 (1986) 543.(J. Van Engen, “The Christian Middle Ages as an Historiographical Problem”, in American Historical Review 91 (1986) 543.) [6]. J. G. 루츠, (편집), 중국 그리스도교 여성 개적차: 성, 그리스도교, 사회적 이동, 베들레헴(PA), 리하이 대학 출판부, 2010(J. G. Lutz, (ed.), Pioneer Chinese Christian Women: Gender, Christianity, and Social Mobility, Bethlehem (PA), Lehigh University Press, 2010); KANG Zhijie, Jidu de xinniang: Zhongguo tianzhujiao zhennü yanjiu, Beijing, Zhongguo shehui kexue chubanshe, 2013. 1차 및 2차 출처에 대한 광범위한 참고 문헌 목록은 A. 듀딩크 – N. 스탠대르트, 중국 그리스도교 텍스트 데이터베이스(CCT-데이터베이스) http://www.arts.kuleuven.be/sinologie/english/cct 참고. [7]. N. 스탠대르트, 의례의 엮음: 장례에 있어서 중국과 유럽간의 문화 교류, 시애틀, 워싱턴 대학교 출판부, 2008 참고. (N. Standaert, The Interweaving of Rituals: Funerals in the Cultural Exchange between China and Europe,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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