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희 모이세 신부 (마두동성당 주임) “저는 우리 본당 신자들 한 분 한 분이 아버지 사랑 듬뿍 받은 막내딸, 막내아들 같이 되었으면 합니다.” 9월 말에 새로운 사목회를 구성하고 사목회장님과 두 총무님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본당 사목을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하고 물으시기에 제가 한 대답입니다. 저의 바람은 무엇보다 신자들 한 분 한 분이 자신에게 쏟아 부어진 하느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자신과 이웃과 세상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친밀해져 편안히 감사할 줄 알고, 아버지 사랑 덕분에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 아버지께도 거침없이 나아가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거리낌 없이 어울리며 편안하고 다정한 친교를 맺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몇 분에게 했더니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신부님, 모두가 막내딸 막내아들이 되면 본당 꼴이 말이 아닐 텐데요.” 저도 은근 걱정이 되긴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도 있고, 그렇게만 되면 모든 게 잘 되리라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강론 시간을 빌어 교우들에게 이를 알리고 복음 말씀에 비추어 설명을 드렸습니다. 마침 그날의 복음이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였습니다. 두 비유에는 각각 남자와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성장’이라는 공통 주제와 연결됩니다. 남자는 겨자씨를 정원에 심고 여자는 누룩을 밀가루 서 말 분량의 반죽에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겨자씨는 자라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은 밀가루 서 말 분량(약 54리터)의 반죽을 온통 부풀게 하였다 합니다. 신자들 한 분 한 분이 막내딸 막내아들처럼 되었으면 하는 저의 바람은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성장’을 믿기 때문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외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조직으로 묶어서 교회를 만들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제자로 삼아 사랑으로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 방식을 참으로 따르고자 함이라고요. 설명 저는 우리 각자가 더 많이 하느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길 희망합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과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존재감 있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되길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 사랑과 신뢰의 텃밭에서 우리의 자유가 성장해 나가리라 믿습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새들처럼 훨훨 날아다니며 사랑과 감사 안에서 희망을 심는 존재들로 성장해 가기를 꿈꿉니다. 겨자씨는 자라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일 품 넓은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 서 말의 반죽을 온통 부풀게 한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의무와 규정과 조직으로써는 그렇게 넓은 품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온통 부풀어 오르는, 신명나는 관계의 한 마당을 펼쳐낼 수 없습니다. 강론 끝에 교우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꼭 막내딸, 막내아들처럼 사랑 안에 생기발랄한 그런 분들이 되셨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다시 한번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본래 둘째 아들인데 오늘부터는 막내아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여쭙겠습니다. 여러분은 몇째인가요?”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교우분들도 씩씩하게 대답해 주더군요. “막내!” 미사 후 그리고 단체들의 카톡방에서 응답들이 있었습니다. “신부님 막내딸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맏딸이라 늘 어깨가 무거웠는데 편안해졌어요!” “맏딸이자 맏며느리로 제대로 하는 건 없으면서도 부담감이 있었는데, 오늘 강론 중에 말씀해 주신 ‘막내딸과 막내아들’ 참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저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음습함과 무거움에 저항하고 싶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보이는 무기력과 권태 앞에서, 그 옛날 아브라함이 소돔을 벌하려는 하느님을 막아서고 실랑이를 벌였듯이 결코 물러서지 않고 거듭 하느님 사랑이 있지 않느냐 되묻고 싶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할머니 신자들의 얼굴 표정은 대체로 밝습니다. 까르르르, 웃음소리와 목소리는 마냥 높습니다. 그분들은 마치 어린 소녀 시절로 되돌아간 듯 보입니다. 제게는 할머니들이 희망입니다. 철부지, 막내들의 행진이 이어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