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원(북한대학원대학교 수료)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한 어느 날, 문득 책장 구석에 놓인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계절이 바뀐 터라 옷 정리를 하다 발견한 그 상자에는 지금까지 받아두었던 편지와 카드가 있었다. 나중에 정리해야지 밀어두었던 기억이 떠올라 상자를 열어 그 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 둘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겉면에 ‘젬마’라고 쓰여진 핑크빛 카드 봉투를 보는 순간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집어 들었다. “사랑합니다”라는 머리글로 시작된 카드에는 “세상에 온갖 어려움, 많은 풍파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잘 견뎌주셨으니 이젠 한국에서 좋고 복된 일들만… 공부 열심히 하시길~”이라는 문장이 쓰여있었다. 하나원 교육 기간 홈스테이 프로그램 참여로 만났던 이모님이 나에게 써주신 카드다. 하나원은 남한에 입국하여 국정원에서 조사를 마친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각종 사회적응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이다. 프로그램 가운데 교육생들을 가장 설레게 하는 일정이 바로 홈스테이(가정체험)였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현실의 남한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하룻밤 자고 오는 일정이기 때문이다. 2명씩 짝을 지어 랜덤으로 배정되었고, 그렇게 나는 다른 동기와 함께 젬마 이모님 댁에서 하룻밤과 다음 반나절을 함께 보냈다. 봄볕같이 따스한 미소로 다정하게 대해주신 이모님 덕분에 1박의 짧은 홈스테이가 나에게 남긴 여운은 짙었다. 반백 년을 훌쩍 넘게 살아내며 쌓으셨을 삶의 지혜를 가르치려 하지 않으셨고, 남한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무조건 응원의 말씀을 해주셨다. 기대 반, 호기심 반의 마음으로 참여했던 일정이 끝나 아쉬운 발걸음을 떼는 나에게 이모님은 연락처가 담긴 그 카드를 주셨다. 그간 몇 번 꺼내 본 적은 있었지만, 이런저런 마음에 선뜻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카드를 다시 읽으면서 연락을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비로소 들었다. 연락처는 바뀌지 않았을까, 왜 미리 연락드리지 못했을까 걱정과 후회 섞인 용기를 내었을 때 다행히도 이모님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10년도 넘었지만 나도 이모님도 서로의 목소리를 대번에 알아들었다. 연결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솟구쳤다. 대전에서 뵀던 이모님은 마침 서울에 계셨다. 당시 남편의 은퇴 이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며 대전으로 옮기셨던 이모님은 최근 다시 서울로 올라오셨단다. 그렇게 서로의 반가운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다음 주 주말로 약속을 잡았다. ⓒ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지하철역 주변의 어느 한적한 커피숍에서 이모님을 기다리던 나는 남편분과 함께 들어서는 이모님을 한 번에 알아뵙고 인사드렸다. 꼭 12년 만의 재회였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옛말도 있으나, 사실 하룻밤에 지나지 않는 짧은 만남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룻밤의 숙식 제공뿐만 아니라 잘 되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도 내어주셨던 이모님, 그런 이모님의 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던 터라 나 역시 10년이 넘는 그 시간 동안 소중한 인연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평화의 길” 집필진으로 참여하며 쓴 첫 글도 대전의 젬마 이모님을 그리며 쓴 “처음 만난 남한 사람”이었다. 이모님도 그간 나의 근황이 몹시 궁금했으나, 언젠가 인연이 되면 연락이 오겠지 하며 기다리셨단다. 나는 그때 참으로 고마웠다고, 반년이 넘는 탈북과정에서 지치고 힘겨웠던 그 순간, 이모님 댁에서 보낸 하룻밤에 많은 위안과 격려를 얻었다고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너무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건강하게 잘 사는 모습 보여드리고,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었다는 나의 말에 이모님은 오히려 잘 살아줘서 고맙다며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셨다. 대학과 대학원 졸업, 취업과 회사생활 등 나의 근황을 일일이 들어주시는 이모님의 얼굴에선 시종일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자식의 기쁨을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 같다고 할까. 헤어질 즈음 12년 전 그날처럼 이모님은 핑크빛 봉투를 건네주셨다. “주님과 함께 꽃길만 걸으시길 빕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5만 원권 지폐 몇 장이 함께 들어있었다. 결국 나는 또 받기만 했다. 젬마 이모님이 생면부지의 나에게 순수하게 베풀어주셨던 사랑은 소박하지만 힘이 있다. 체제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한국에서의 생활, 결코 녹록지 않았으나 수많은 ‘젬마 이모님’ 덕분에 나는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 아닐까. 곧 겨울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