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농태기와 술문화

장혜원(북한대학원대학교 수료) 1990년대 중반이었다. 외식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북한에서 아버지는 주말이면 집에서 술을 즐겨 드셨다. 가끔은 동네 친구분들과 함께 술 한 잔을 기울이시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셨고, 때로는 친구분의 집으로 나들이도 가셨다. 그럴 때마다 챙기시는 것이 바로 ‘농태기’였다. 농태기는 북한에서 개인들이 제조하는 밀주(密酒)다. 이 술은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도 천차만별이다. ‘고난의 행군’시기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 식량 공급이 정상적이었던 때에도 국영 식료품 상점에서 판매하는 술의 양이 세대(世帶)당 한정돼 있다 보니 늘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했다. 일찍 장사에 눈을 뜬 사람들은 이 수급 불균형을 이용해 돈을 꽤 벌었다. 북한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각 지역의 주류 Ⓒ데일리NK 1990년대 북한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농태기 생산량은 급증했다. 늦은 저녁이나 새벽을 이용해 몰래 제조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시도 때도 없이 보란 듯이 만들었고, 술 뽑는(북한에서는 술을 제조하는 것을 뽑는다고 표현한다) 집도 늘어났다. 먹을 식량은 부족한데, 술 생산을 위해 소비되는 식량이 늘어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농태기의 주원료는 옥수수였지만, 식량 사정이 심각해지자 감자나 도토리를 대체재로 이용하기도 했다. 옥수수로 만든 농태기는 숙취가 심한 편이지만 감자나 도토리로 만든 농태기의 숙취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런 농태기를 마시고 나면 온종일 얼떨떨한 세계에 머물게 된다고 한다. 마신 날은 물론 다음 날에도 숙취를 느낄 만큼 후유증이 세다. 그래도 북한 사람들은 농태기를 즐겼다. 술 공장은 생산을 멈췄고, 살 수 있는 술은 농태기 뿐이었던 시절이라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함경북도 청진 Ⓒ 영남일보 함경북도 청진에는 모주촌이라 불리는 유명한 술 동네가 있었다. ‘모주’는 술을 뽑고 난 후 남는 찌꺼기를 이르는 북한말이다. 청진제1사범대학이 자리하고 있는 청진시 송평구역 강덕동이 바로 모주촌이다. 이 모주촌에서 만드는 농태기들은 나름 역사가 있다. ‘아무개 집 술’이라고 하면 주변 30리 안팎에서 모를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아버지도 이 집 농태기를 참 좋아하셨고, 이 술에 이름도 붙이셨다. 바로 ‘뿌12’였다. 우리가 살던 곳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라 자주는 아니고 가끔 인편에 부탁해 사오곤 했는데,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아버지는 귀신같이 알아보셨다. 한 모금만 드시고도 바로 ‘오~, 뿌12구나!’라며 반가워하셨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느 순간 그렇게 이름 붙인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여쭤봤더니 아버지는 이렇게 답하셨다. ‘뿌옇잖아, 그러니까 뿌에 12년을 붙인 거지.’ 재차 물었다. ‘12년은 왜요?’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술잔과 술병들이 진열돼 있는 장식장 한쪽을 가리키셨다. 거기에는 발렌타인 12년산이 포장도 안 뜯긴 채 고이 모셔져 있었다. 몇 달 전 외국을 다녀온 삼촌이 선물한 것이었다. 그래도 갸우뚱거리는 나를 위해 아버지는 저 술을 생산한 지 12년이 된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이셨다. 그러고는 ‘아무개 집 술’을 만드는 아주머니가 9년 전부터 술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술맛은 공장 술 못지않으니 선심을 써서 ‘뿌12’이라는 이름을 붙이셨다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의 정제 기술이 발달하면서 뿌옇던 그 집 농태기는 맑은 빛이 돼 갔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뿌12’라는 애칭을 사용하셨다. 나중에 친한 동료분을 불러 함께 발렌타인을 드시던 아버지는 이런 농담도 하셨다. ‘술이 줄어드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구나!’ 아버지는 애주가셨다. 그러나 한 번도 술을 드시고 실수하신 적이 없었던 아버지인지라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가 술 드시는 것을 보고 핀잔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어머니는 모주촌에 가는 인편이 있으면 당신의 남편을 위해 몸소 ‘뿌12’를 부탁하시곤 했다. 요즘도 우리는 음주운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유명인에 대한 뉴스를 심심찮게 접하고 있다. ‘윤창호법’이 만들어지면서 사회적 질타와 반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거치면서 줄었던 음주운전 단속 건수가 최근 다시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북한은 개인이 차를 소유하고 있는 비율이 낮다 보니 음주운전으로 인한 문제가 별로 없다. 대신 음주로 인한 폭행이나 성추행 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더욱이 ‘주량(酒量)이 도량(度量)이다’는 잘못된 인식과 ‘술을 마셨으니 그럴 수 있지’라는 관용적인 문화가 여전하다. 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적절한 양은 몸에 이로운 면도 있다지만, 과하면 건강에 해롭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건강한 음주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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